⬛재단법인 21세기포럼 ‘제54차 정례포럼’/‘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
⬛재단법인 21세기포럼 ‘제54차 정례포럼’/‘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
  • 교회복음신문/한국기독타임즈
  • 승인 2023.05.1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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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장제원 국회의원(부산 사상구)
"신앙과 정치, 아버지의 영향 절대적"
아버지는 늘 쪽지와 엽서, 편지로 격려
지난 5월11일(목) 정오 부산롯데호텔 41층에서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사장 양한석) 제54차 정례포럼에서 장제원 국회의원이 '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라는 주제발표(간증)을 했다.
지난 5월11일(목) 정오 부산롯데호텔 41층에서 개최된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사장 양한석) 제54차 정례포럼에서 장제원 국회의원이 '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라는 주제발표(간증)를 했다.

기독교문화 창달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 온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사장 양한석)이 지난 511() 정오 부산롯데호텔 41층에서 장제원 국회의원(18·20·21대 국회의원, 부산 사상구)을 강사로 제54차 정례포럼을 개최했다.

부산 기독교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날, 포럼 이사 남일제 교수(동서대학교)의 사회로 강사소개, 주제발표, 오찬기도(예장통합 증경총회장 김태영 목사), 질의/응답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장제원 의원은 먼저, “여기까지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 경외신앙의 힘이었다힘들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는 실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앙심을 소개했다.

장 의원의 간증은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맺었다.

지난 2015126일 천국 가신 장성만 목사는 제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정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의장국회부의장 역임, 동서학원을 설립했다.

한국교회 목사이며 정치인이며 교육자인 아버지로부터 신앙과 정치를 물려받은 아들 장제원 의원은 늘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다고 간증했다.

장 의원은 지금까지 달려 올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자신(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시기 위한 아버지의 부단한 노력을 꼽았다.

첫 번째아버지가 정치를 하시고 대학을 설립하시고 목회를 하시는 그 과정에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뵙기가 많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저게 늘 쪽지편지’, ‘엽서로 관심과 사랑,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아침 새벽에 출근하실 때 자고 있으면 책상 위에 제원아! 새벽을 이겨야 성공한다는 아버지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아껴주시고, 내가 필요한 걸 아시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아버지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본다며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쌓아 갔음을 고백했다.

원동력의 두 번째는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낙선했을 때 새벽녘에 희미하게 들리는 음성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찬송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러한 고난 속에서 확실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께서 좋으신 하나님이시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이 실천적 경험 속에서 신앙이 있구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라는 느낌을 가졌다.”고 전했다.

세 번째는 장제원 의원이 서른여덟 살 때 아버지한테 정치하겠다고 했을 때,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는데 1등을 해라.”는 말씀을 듣고 아니! 아버지! 목사님이시며 교육자 출신이 뭘 1등을 하라고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1등이 너와 너 가정과 우리 집안을 위함이 아니고 대한민국을 위한 1등 그건 두 번째다. 첫째는 네가 1등 국회의원이 돼서 1등 정치인이 돼서 은퇴 후 아버지가 세운 대학교회에서 저는 너무 약하고 너무 모자라고 너무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 덕분으로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이렇게 성공했습니다.”라고 실천적 간증을 하는 것이 실제로 이게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했다.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사장 양한석) 제54차 정례포럼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사장 양한석) 제54차 정례포럼

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들 장 의원에게 또 한 번의 신앙적 실천을 해주었다고 했다.

공천을 받지 못하고 야인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암과 투병하고 있었다.

그때 장 의원은 아버지께 저 재기하는 거 보시고 돌아가실 거죠.” “그래 제원아 내가 너 반드시 제기하는 것 보고 내가 간다. 하나님 나라 간다.” “아버지 저 재기하는 것 보고 돌아가시기로 했잖아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 막내아들 재원이에게 한 번이라도 약속 안 지킨 거 있냐” “없습니다. 이번에도 약속 지켜야죠?” “재원아! 이번에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장 의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면서도 흔하게 남겼던 편지, 쪽지, 엽서 하나 없이, 유서나 유언 하나 없었던 원망이 1, 2년 지나고 난 다음에 아버지의 위대한 신앙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시간까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 뜻대로 최대한 노력을 해서 살다가 하나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르겠지만 부르시는 날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가겠습니다. 하고 가면 그만이지 여기에 무슨 매듭이 있고 무슨 유언이 있고 유서가 있겠느냐, 본인이 죽음을 알면서도 그 맨날 아들한테 주던 엽서 하나 편지 하나 없이 남기지 않았다.”며 아버지의 위대한 신앙을 발견하게 됐다고.

재단법인 21세기포럼 이사장 양한석 장로를 비롯한 이사 일동(앞 줄 우측 3번째가 장제원 국회의원의 어머니 박동순 동서학원 이사장)
재단법인 21세기포럼 이사장 양한석 장로를 비롯한 이사 일동(앞 줄 우측 3번째가 장제원 국회의원의 어머니 박동순 동서학원 이사장)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장제원 의원이 왜 정치를 하느냐?”까지 이어졌다.

첫째YH무역 농성 사건(신민당 당사 점거)을 접한 장 의원이 국민들이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도저히 내가 내 힘으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 정치인을 찾아가서 나의 어려움을 하소연을 하고 정치인은 억울한 국민들을 대신해서 그걸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정치는 한번 해볼 만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정치 다짐 배경을 들려주었다.

둘째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지 않고 그곳에 들어가서 정치를 시작한 배경에 대해 아버지는

전두환을 통해서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통성 없는 정부지만 이 정부 내에서 내가 국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권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지켜봐라고 해 아버지의 정치를 쭉 지켜봤다는 아들 장제원 의원은 아버지가 정책의장이 되시더니 복지 정책을 만드시는데 전 국민의 의료보험제도를 저희 아버지가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드셨으며 이후 초등학교 무상의무교육, 최저임금 제도를 주창, 관철을 이끌어 내심으로 한 사람의 정치인의 생각과 그런 철학과 노력이 세상을 바꿨음을 자랑스럽게 평가했다.

이어서 초선의원으로서의 한계와 3선 국회의원로서의 윤석열 대통령 당선, 정치인으로서 앞으로의 각오도 내 비쳤다.

특히 장 의원은 3가지의 높은 산 중 두 개의 산은 어렵게 넘었는데, 하나의 산을 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3가지 산이라면, 정권교체,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였으며 나머지 하나의 산은 내년 총선에서 다수당을 희망했다.

포럼 이사 남일제 교수(동서대)의 사회
포럼 이사 남일제 교수(동서대)의 사회
예장(통합) 증경총회장 김태영 목사(백양로교회)의 오찬기도
예장(통합) 증경총회장 김태영 목사(백양로교회)의 오찬기도

그러면서 아버지처럼 참 좋으신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 내가 조금 실수하고 모자라도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5년밖에 정치를 안 해봤지만 내가 뭘 가지려고 잡으려고 하면 안 잡힌다.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서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실천적인 신앙의 삶을 그리며 기다리면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며 주제강연(간증)을 마무리했다.

교회복음신문/김다솜 기자cgnnews@hanmail.net

 

다음은 장제원 의원의 신앙과 정치라는 주제발표 강연 일부를 발췌해서 게재했다.

제가 여기까지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의 힘이라고 봅니다.

제 신앙에 있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무서운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 저를 밀쳐 내지 아니시고 따뜻한 손으로 저를 잡아주시는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제가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달려온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 저희 아버지는 제게 아버지의 형상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으로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어릴 때 저나 저희 아버지는 똑같은 길을 걷는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제 아버지가 정치를 하시고 대학을 설립하시고 목회를 하시는 그 과정에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가 안 계시고 또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시고 매일 텔레비전에서 보는 게 저희 아버지였어요. 정치인 아버지의 모습이었기에 아버지를 자주 뵐 수가 없었죠. 가장 민감했던 중고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장제원 정치인이 아버지께 많은 것을 전수 받지 못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저를 쪽지편지로 양육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시선이 항상 나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얼굴은 자주 보지 못하고 많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나에게 항상 시선을 고정하고 있구나라는 그런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아침 새벽에 출근하실 때 제가 자고 있으면 책상 위에 쪽지가 있어요.

제원아! 새벽을 이겨야 성공한다.”

그럼 아침에 일어나서 그 쪽지를 보면 우리 아버지는 출근하실 때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셨구나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아버지가 출장을 자주 가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대학 설립하실 때 외국 교회에서 많은 헌금을 받아서 어머니한테 보내주면 그 돈으로 학교를 키워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외국 나가실 때 저에게 항상 엽서를 보내주세요. 그 당시만 해도 핸드폰이라든지 카톡이라든지 이런 게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저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보내주신 엽서였어요.

대한항공 엽서도 있고 그 지역에 전경을 담은 그림엽서도 있잖아요.

엽서에 재원아! 오늘은 L.A에서 오늘 어떤 일을 하고 아빠는 이렇게 열심히 일했단다 너는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라아버지께서는 외국에 나가시면 엽서를 늘 보내주셨는데, 아버지의 엽서를 기다리게 된 거죠. 아버지와 저의 소통 창구가 쪽지와 엽서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늘 관심을 가지고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생활 습관이 있고 뭐가 문제고 뭐가 장점인지를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아버지 역시 항상 나에게 쪽지와 엽서로 저를 양육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어릴 때 음악 안 시켜준다고 제가 가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 백기 투항하고 집에 왔는데, 화가 나신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빡빡 깎았어요. 머리를 다 깎았어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투쟁을 해도 삭발 투쟁을 안 합니다. 그때 충격 때문에 삭발 투쟁은 절대 안 해요.

제가 벌벌 떨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신 거예요. 그때 어머니처럼 무섭게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나이키 운동화였어요.

아버지께서 나이키 운동화를 사 오셔서 재원아! 이게 갖고 싶었다면서...” 건네주시고는 음악은 대학 가서 하자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버지는 항상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바라는 게 뭔지를 아시고 시선을 항상 고정시키셨기에 제가 너무 나갔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었지요.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아껴주시고, 내가 필요한 걸 아시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아버지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두 번째 결정적인 장면은, 저희 아버지가 아마 13대인지, 14대인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는데, 낙선을 하셨어요. 그때는 새벽 1시나 2시가 돼야 당락이 결정되는데 저희 아버지가 무소속 출마로 경쟁하다가 낙선을 하셨어요.

근데 새벽 5시경,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린데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이 찬송가가 들리는 겁니다.

보통 낙선한 후보자의 집은 초상집과도 다름없는데,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찬송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모습이 뭘까 도대체 아버지의 이 찬송은 어떤 걸 의미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낙선 3년 후 동서대학교 설립 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엄청난 실패를 안기고,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빼았었지만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오늘날 동서대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그 좋은 것을 예비하고 있는 거 아닌가? 저는 그걸 직접 보고 체험을 했습니다.

대학생 때니까 제가 그거를 잘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에 대한 관찰을 쭉 하면서 제가 실천적으로 체험적으로 느낀 아버지의 신앙적 고백이 이 장면이었다는 거죠.

그 당시 제가 뭐가 어렵습니까? 뭐가 부럽습니까? 대학 재단 이사장 아들, 목사님 아들, 또 정책위장, 국회 부의장 아들에 아버지께서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시지, 어머니는 조금 무서웠지만 나를 사랑해 주시지 내가 세상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정말 잘 자랐죠. 그런데 아버지를 통해서 그러한 고난을 주시고 그 고난 속에서 확실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좋으신 하나님이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이 실천적 경험 속에서 신앙이 있구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세 번째가 제가 서른여덟 살 때 아버지한테 정치하겠다고 했을 때,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는데 1등을 해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니 아버지! 목사님 출신이 교육자 출신이 뭘 1등을 하라고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1등이 너와 너 가정과 우리 집안을 위함이 아니고 대한민국을 위한 1등 그건 두 번째다. 첫째는 네가 1등 국회의원이 돼서 1등 정치인이 돼서 은퇴 후 아버지가 세운 대학교회에서 저는 너무 약하고 너무 모자라고 너무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 덕분으로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라고 실천적 간증을 하는 것이 실제로 이게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또 한 번의 신앙적 실천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12월에 돌아가셨는데 20164월에 제 총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항암 투병을 하실 때 아버지께 말씀을 드린 게 있어요.

그 당시에 제가 한번 공천을 못 받아서 출마를 못하고 4년 동안 제가 야인으로 있었잖아요.

그때 아버지께 저 재기하는 거 보시고 돌아가실 거죠.” “그래 제원아 내가 너 반드시 제기하는 것 보고 내가 간다. 하나님 나라 간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돌아가실 때 저 유서 한 장 못 받았습니다. 유언 하나 없었어요. 아니 그냥 남김없이 돌아가신 거예요.

폐에 물이 찼을 때 이걸 빼면 좀 더 사신다고 해도 안 빼시겠다고 그랬어요. 본인이 돌아가시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저 재기하는 것 보고 돌아가시기로 했잖아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 막내아들 재원이에게 한 번이라도 약속 안 지킨 거 있냐” “없습니다. 이번에도 약속 지켜야죠?” “재원아 이번에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도대체 왜 왜 이분이 돌아가신 걸 알면서도 나한테 잘해주던 편지 그 쪽지 하나 안 남기시고, 왜 말씀 한 마디 없었을까? 장례식 후 이사장실에 갔더니 안경 그대로, 자기가 집필하던 볼펜

그 원고지 그대로, 그리고 비서한테 나 병원 갔다가 올 게한마디 남기고 안 돌아오셨다는 거예요.

이게 뭐냔 말이에요. 저는 한 1, 2년 지나고 난 다음에 아버지의 위대한 신앙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깨우신 분이다. 하나님이 나를 들어 세우시고 일을 시키셔서,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면 되지 이 세상에서 내가 남긴 게 뭐라고 정리하고 후세들에게 뭘 훈계를 하고 내가 내 책에 도대체 내가 이 인생에서 도대체 하는 게 뭐가 있다고 정리하고 남기냐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면서 고비 고비마다 다 책으로 엮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또 우리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했는데 마치는 날 이러시오. 저러시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이 주신 시간까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 뜻대로 최대한 노력을 해서 살다가 하나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르겠지만 부르시는 날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가겠습니다 가면 그만이지 여기에 무슨 매듭이 있고 무슨 유언이 있고 유서가 있겠느냐, 본인이 죽음을 알면서도 그 맨날 아들한테 주던 엽서 하나 편지 하나 없이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한 신앙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깨우신 그 모습이 어떤 유언이나 어떠한 쪽지보다 어떤 유서보다 위대한 거 아닌가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태 신앙으로 아버지의 목회를 아기 때부터 봐 왔습니다.

낙선 후 위기에 몰렸을 때 가장 실패한 순간에 자식과 그 주변에 확실한 아버지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그 실천적 행동 그리고 자식이 새로운 세계로 갈 때 하나님을 믿어라는 말씀 그리고 돌아가실 때 남기지 않으신 그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저의 신앙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저는 온전히 저희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신앙 속에서 컸고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아직도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아들이 사고를 많이 치고 있는데 제가 우리 아버지같이 우리 아들에게 했다면 과연 우리 아들이 나처럼 빨리 돌아왔겠지요.

요즘은 이메일이나, 카톡이나, 페이스북이나, 문자 등이 많지만 우리 아들에게 글 하나 제대로 보내지 못한 그런 아버지입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에 비해서 너무 부족한 아버지입니다. 아니 옛날에는 우리 아들 사고 치면 우리 아들이 미워 죽겠다고 했는데, 요즘은 불쌍해요.

장성만 같은 아버지를 못 만나서 우리 아들이 저렇게 된거니까 장재원이가 아버지의 반만 돼도 우리 아들이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까라고 생각해보면 반성이 많이 돼요.

그래서 제가 요즘은 문자를 넣습니다. 우리 아들한테 "아들아! 사랑한다고 보내면 답이 와요.

제가 도저히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좇기 위한 그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버지의 얘기, 나의 신앙을 얘기했고, 이제 정치를 왜 하느냐?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합니다.

첫째YH무역 농성 사건으로써, 가발 공장의 여공들이 월급을 못 받고 그거를 하소연하기 위해서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서 농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 신민당 김영삼 대표가 그 YH무역이라는 그 가발 공장 여공들에게 여러분의 권익을 위해서 제가 대신 투쟁해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197989일 가발 제조업체인 YH무역 노동 조합원들이 회사의 부당한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고,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의원직에서 제명당했던 사건입니다.

제가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도대체 가발 공장 여공들이 월급을 못 받았으면 사장 집에 가서 따져야지 왜 신민당 당사에 가서 드러눕고 하냐 그래서 제가 궁금했거든요.

그때 아버지가 보시던 월간 조선에서 YH농성 사건을 읽어봤어요.

국민들이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도저히 내가 내 힘으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 정치인을 찾아가서 나의 어려움을 하소연을 하고 정치인은 억울한 국민들을 대신해서 그걸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구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정치를 한번 해볼 만하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두 번째는 저희 아버지가 정치를 시작하신 게 전두환 때입니다.

객관적으로 왜 우리 장성만 목사가 군화발로 국민들을 짓밟은 절대 독재 권력 전두환 정권의 정치를 시작했지 이건 아니지 않아 이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활동을 해야지 그 당시 만약에 우리 아버지가 YMCA 이사도 하시고 시민사회 운동을 하셨는데 이런 군부 독재 세력과 결탁해 손을 잡고 활동을 하냐며, 심지어 제가 대학 다닐 때 전두환 정권 대통령 화형식 하면서 우리 아버지 얼굴 올려놓은 것도 봤었거든요.

저는 아버지에게 늘 왜 전두환 독재 권력에 맞서서 싸우지 않고 거기에 들어가서 일을 하십니까.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물리적으로 사람이 자연적인 생명의 한계의 나이가 50에서 65세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데 내가 이 사회에 대고 영향을 미치고 이 사회를 좋게 만들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이 불의의 정권에 맞서서 싸워서 이 정권을 붕괴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전두환 정권은 들어섰고 이 정권이 잘 되는 것은 국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권 내에서 내가 역할을 찾아서 그 전두환을 통해서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통성 없는 정부지만 이 정부 내에서 내가 국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다면 내가 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권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지켜봐라 하셔서 아버지의 정치를 쭉 지켜봤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정책의장이 되시더니 복지 정책을 만드시는데 전 국민의 의료보험제도 그거를 저희 아버지가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드셨어요.

그 당시만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돈이 없어서 주사를 못 맞았습니다.

그런데 전 국민의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해서 1천 원짜리 한 장으로 주사를 맞을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두 번째초등학교 무상의무교육을 저희 아버지가 주창하시고 그걸 관철시켰습니다.

모든 국민들을 초등학교까지 의무교육(무상)을 통해 국민들이 문맹을 탈피하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최저임금 제도입니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저희 아버지가 정책의장 때 주창을 하셔서 최소한 우리가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노력한 만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최저임금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이라고 봅니다.

전두환 정권이라는 가장 꼴통 보수적인 정권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책을 과연 장성만이라는 정신이 없었다면 이걸 누가 감히 그 서슬 퍼런 전두환 대통령한테 가서 얘기를 꺼낼 수 있었겠습니까?

한 사람의 정치인의 생각과 그런 철학과 노력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최저임금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 전 국민의 의료보험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는 전혀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중요한 전환점을 장성만이라는 정치인이 전두환 정권에 들어가서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저는 만들어낸 그 모습을 보고 그래! 정치가 YH 농성 사건처럼 억울한 국민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또 한 명의 정치인의 꿈과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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