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길구가 만난 사람 서울신학대 이길용 교수편
■ 김길구가 만난 사람 서울신학대 이길용 교수편
  • 한국기독타임즈/교회복음신문
  • 승인 2021.02.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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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시대의 루터의 재발견
좌로부터 마르틴 루터, 루터 - 아르테 arte, 저자 이길용 교수
▲좌로부터 마르틴 루터, 루터 - 아르테 arte, 저자 이길용 교수

국내 최강의 필진으로 기획된 아르테 출판사의 야심작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26

번째 책으로 서울신학대 이길용 교수의 루터가 출간되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일대기를 그들이 나고 자란 지역과 연결하여 기행문 형식의 올 컬러 글 반, 사진 반 편집으로 마치 안내서를 들고 여행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 좋은 책

이다. 여기에 저자의 학술적 깊이와 맛깔스런 글 솜씨가 어우러져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문답형식으로 지난 123일 서면 카페 클레어에서 이루어졌다.

▲1483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다-루터의 시작과 끝. 생가와 사가(死家)가 있는 작은 도시로 그가 거주기간은 정작 5개월에 불과하였다.
▲1483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다-루터의 시작과 끝. 생가와 사가(死家)가 있는 작은 도시로 그가 거주기간은 정작 5개월에 불과하였다.

-2017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출간 예정이었던 <루터>편이 늦어져서 독자들이 많이 기다렸을 것 같은데?

마지막 저자 교정을 앞두고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어 작업을 빨리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지난 여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지난 12월에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지금 나온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루터 역시 팬데믹을 겪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루터 바로 전 시대 유럽은 페스트라는 무서운 감염병으로 당시 인구 3분의 1이 절멸했으니까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루터와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1501 완전한 모습의 성서를 보다-당시 약1,000쪽이 넘는 성서는 250~300마리 양의 가죽으로 필경사가 수십 개월 써야 하는 귀한 책이었다.
▲1501 완전한 모습의 성서를 보다-당시 약1,000쪽이 넘는 성서는 250~300마리 양의 가죽으로 필경사가 수십 개월 써야 하는 귀한 책이었다.

-이 책이 다른 평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루터가 살았던 14~15세기 중세의 삶에 집중했습니다. 루터에 관한 많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루터가 종교 쪽 인물이다 보니 신학과 신앙에 경도된 책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 독자에겐 낯설고 어색한 면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신학 용어나 개념들이 많다보니 루터란 인물의 참모습을 알기도 전에 흥미를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일반 독자도 이해하고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루터평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책의 집필을 그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1517 95개 논제를 걸다-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자보를 내걸었던 비텐버르크교회의 정문. 지금은 95개 논제가 철문에 새겨져 있다.
▲1517 95개 논제를 걸다-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자보를 내걸었던 비텐버르크교회의 정문. 지금은 95개 논제가 철문에 새겨져 있다.

-교수님은 문화사에 관심이 많으신데?

‘“루터,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은 그의 신앙과 더불어 페스트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결과물입니다. 이 시대적 상황이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운동도 실패했을 겁니다. 그리고 루터의 개혁운동이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신을 찾는 한 개인’, 주체적 개인입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사조의 시작이라고도 하겠죠.”

▲1521 황제 앞에 선 루터-황제 카를 5세는 신교세력을 탄압할 목적의 보름스회의에서 양심과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함.
▲1521 황제 앞에 선 루터-황제 카를 5세는 신교세력을 탄압할 목적의 보름스회의에서 양심과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함.

-요즘 젊은들이 힘들어 합니다. 청년 루터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루터는 페스트와 전쟁이 훑고 지나간 바로 다음 세대의 청년이었습니다. 그 역시 두 명의 동생을 페스트로 잃었고요. 그러다 보니 매 순간 죽음의 공포가 그를 흔들었고, 루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길을 선택합니다. 루터가 얼마나 절실하게 이 죽음의 공포와 싸웠던 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도 신부를 찾아가 고해를 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지도 신부가 지나친 고해성사보다는 기도와 성서 암송에 시간을 투자하라고 했을까요. 이후 루터는 신부의 지침대로 기도와 성서 암송에 집중하여 그가 속해있던 수도원에서 인정받아 사제가 되고 신학을 공부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는 그를 떠나지 않았고,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그를 계속 괴롭혔죠. 전집 서문에 적힌 당시 루터의 심정이 그때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라는 개념을 법리적으로만 이해하고, 또 그렇게 배웠다. ‘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양자간 맺어진 약속과 계약을 성실히 수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에 합당한 삶을 살겠는가. 그래서 난 의를 생각할 때마다 괴롭고 너무 힘들었다. 난 이런 의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하나님을 저주해 마지 않았다.” 독일어로 그의 전집을 읽으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루터가 저주했다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절절히 당시 불안이 강했고 공포가 심했으면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말까지 했을까.”

▲1521 바르트부르크성에 유폐되다-제국 추방령이 내려져 가톨릭 세계의 공적 이단자가 된 루터를 선제후 프리드리히3세가 이곳으로 피신시킴
▲1521 바르트부르크성에 유폐되다-제국 추방령이 내려져 카톨릭 세계의 공적 이단자가 된 루터를 선제후 프리드리히3세가 이곳으로 피신시킴

-그 고민을 루터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런 루터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성서를 읽으면서. 성서학 박사였던 루터는 성서를 원어로 읽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시작합니다. 성서 속 하나님은 무섭고 두렵고, 높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지리 같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견고한 위계질서 속에 위압적으로 묘사된 신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 루터에게 읽힌 겁니다. 그래서 루터는 분연히 일어나 성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게 됩니다.”

▲개혁의 모토를 담은 스테인글라스-인간이 신에게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 외 어떠한 매개도 필요치 않다는 의미.
▲개혁의 모토를 담은 스테인글라스-인간이 신에게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 외 어떠한 매개도 필요치 않다는 의미.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이런 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이란 제도와 조직을 바꾸는 운동이 아닙니다. 루터는 가톨릭이 독점했던 성서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해석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 성서의 번역입니다. 성서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가득한데, 라틴어로 된 성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성서를 읽고 그곳에서 신의 사랑을 발견하여 참된 를 획득하기를 바랬던 루터는 성서를 가장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 마저 읽지 못하는 이들이 생길까봐 교회를 세우는 곳마다 함께 학교를 세워 공교육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루터의 학교 남녀의 제한은 없었습니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공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루터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의의는?

바로 이 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해석학적 운동이며, 독서 혁명입니다. 구원은 읽음에 있고, 읽는 것이 혁명이 됩니다. 실제로 루터 번역 성서는 한 집 건너 하나씩 구입하게 되고, 이제 지역마다 루터의 성서를 읽는 독서 모임이 생겨납니다. 신부의 강론을 통해서, 그것도 라틴어로만 맛을 보던 성서를 집마다 소유하고 읽게 되니 사람들의 지적 수준도 한 단계 올라서게 되고, 결국 이것이 유럽 사회 전체를 한 단계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복음신문 보도
교회복음신문 보도

-부제로 근대를 연 마지막 중세인이라고 하셨는데 이유와 그의 한계는?

루터가 주체적 개인이라는 근대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점은 분명하나, 그는 여전히 중세적 가치관에도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는 누구보다 뚜렷하게 주체를 외치고 독립적 판단과 주장을 했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군에 대해 그가 취했던 태도나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언설 등은 그 역시 중세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건 루터의 한계이자 동시에 시대의 한계라고 봐야 하겠지요.”


-통독이후 루터가 다시 부상하는 이유는?

루터는 소통 지향적이어서 당시 종교와 관련된 많은 것을 독일어로 바꿉니다. 성서 번역은 물론이고, 예배도 찬송가도 모두 독일어로 바꾸어 버립니다. 특히 찬송가도 전문가 중심의 가톨릭과는 달리 회중 찬송의 길을 연 것이 바로 루터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천오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들이 부르는 예배 찬양의 길이 루터 때문에 시작된 것이죠. 루터의 성서 번역은 이후 근대 독일어의 표본이 되었고, 루터의 학교는 독일 공교육의 시초가 되었고, 루터의 회중 찬송은 음악을 비롯한 독일의 예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니, 지금의 독일다움의 시작이 바로 루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의 민족주의가 일어서는 곳마다 루터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통독된 이후 갈라졌던 동서독 사람의 마음을 묶고 이어지는데 루터같은 좋은 영웅도 없겠죠. 그런 점에서 루터는 독일 민족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김길구 전 YMCA 사무총장
▲김길구 전 YMCA 사무총장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소통입니다. 루터 성서 번역의 기준은 시장 바닥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벽 쌓고 담으로 막으면 신앙의 확산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루터는 탑 속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성서를 읽고 복음의 기적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도 그러한 루터의 바람에 따라 성서를 읽으며 개혁운동에 하나가 되어 갔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루터의 개혁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면, 다시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겁니다. 누군가가 떼 먹여주는 성서가 아니라, 스스로 읽어내는 그래서 깨닫고 공감하는 자립적 성서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겁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루터의 개혁운동은 해석학적 운동이요 독서 혁명입니다. 스스로 읽고 깨우치고 행동하는 것이 이 개혁운동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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