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
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
  • 교회복음신문
  • 승인 2019.08.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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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교수를 다시 생각하다
손봉호 교수는 좌파 진영의 수석 대변인?
손봉호 교수의 다면적 얼굴들
필자/박남훈 주안교회 담임목사/문학평론가/문학박사/ ‘기독사상과문화비평’ 주간/도서출판 ‘세컨리폼’ 대표
필자/박남훈
주안교회 담임목사/문학평론가/
문학박사/ ‘기독사상과문화비평’ 주간/
도서출판 ‘세컨리폼’ 대표

-손봉호 교수를 다시 생각하다
-손봉호 교수는 좌파 진영의 수석 대변인?
-손봉호 교수의 다면적 얼굴들

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1)

 

1.손봉호 교수를 다시 생각하다

최근 한기총 회장 전광훈 목사의 폭탄 발언으로 한국교계 안팎이 떠들썩하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내가 아는 좌파 유력 인사가 페이스북에 손봉호 교수가 20112월 시사저널과 인터뷰했던 기사를 올린 내용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http://www.sisapress.com).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좌파 인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기사를 페이스북에 올린 의도를 깨닫고서 마음이 몹시 복잡해졌다.

그 좌파 인사가 이 시점에서 8년 전의 기사를 페이스북에 다시 올린 의도는 명확했다. 그 기사에서 손 교수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어긋난다.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만큼 타락한 교회는 없었다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좌파 인사가 이 기사를 올린 의도는 무엇인가. ‘개신교 역사상 지금 한국교회만큼 타락한 교회는 없었다고 보수 중의 보수인 고신교단에 속한 손 교수가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한기총 회장이라는 전광훈 목사의 발언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의도였던 것이다. 그 좌파 인사는 페이스북에서 손 교수를 침이 마르도록 존경하고 칭찬하면서 한기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예 논의의 가치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손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올린 것 자체로, 그리고 그저 손 교수를 칭찬만 해도, 자연스럽게 한국교회는 저절로 디스가 되어버리는 논리를, 그 좌파 인사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에게 그런 기쁨을 준 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


2.손봉호 교수는 좌파 진영의 수석 대변인?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교회만큼 타락한 교회는 없었다는 손 교수의 담론에는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다는 명제로 정리될 수 있는 그의 발언에서 먼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한국교회라는 보편교회 개념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2011년 당시 한기총의 돈 선거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손 교수는 이 사건을 한국교회 일부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지금의 한국교회라는 보편 교회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일부 교회에서 문제를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라는 보편교회 개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라는 보편교회도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 교수는 이 부근에서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하고 있다. ‘존경받는 목사도 많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손 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에 대한 미움이 더 크다. 그분들의 고결함이 도매급으로 상처를 입으니까 그렇다.” 여기서 그는 엉터리를 한국교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엉터리가 아닌 그분들의 고결함을 자신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원인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어떻게 하든지 한국교회라는 보편교회를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로 정죄하기 위한 손 교수의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난청 전략을 읽는다.

한국교회가 모두 다 손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기복신앙매관매직성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한국교회가 은혜 받고 구원받는 것만 강조하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일부 문제가 있는 교회들 외에는 손 교수가 말하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윤리라는 단어를 잠시 빌리자면, 비판에도 쓴 소리에도 윤리가 있어야 한다. 개신교에 속한 한 사람으로 필자는 그의 이 발언에 대해 한국교회에 정중하게 사과하고, 이를 철회하기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

필자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다라는 판단명제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적지 않는 부분들, 특히 목회자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라고 판단하고 있는 손 교수의 의도는 무엇인가. 무슨 근거로, 무슨 잣대로 이런 판단을 그는 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필자가 근거나 잣대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손 교수의 입장에서는 가장 타락한이라는 최상급의 비판 수사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한국교회는 가장 타락한 교회로 정죄되는 동시에, 비판 주체인 손 교수는 최상급의 의인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 땅은 한국교회를 공격하려는 좌파와 연합세력에 포위되어 있다. 이런 마당에 좌파에게 한국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최상급의 비판 프레임을 제공하고 있는 손 교수는 누구인가? 그는 개신교의 낙랑공주인가? 아니면 좌파 진영에서 똑똑하다고 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좌파 개신교 비판 전담 수석대변인인가? ‘미스터 쓴 소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손 교수의 이 발언은 단순한 쓴 소리가 아니다. 쓴 소리를 사랑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는 사랑이 없다. 그의 발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한 윤리만이 존재한다. 손 교수는 한국교회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면 무너뜨릴수록 그만큼 더 자신이 의로워지는 21세기 바리새인이다.


3.한국교회를 위해, 다음 세대의 신자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손 교수를 재평가해야 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윤리교사가 아니다. 바리새적 교회 파괴자다.

인터뷰 기사에서 앞으로 한국교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손 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 “윤리적인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 또 하나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라는 말씀이다. 물론 나의 원수는 용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 이웃의 원수를 용서할 권한은 없다. 오히려 분노해야 한다. 나의 원수와 내 이웃의 원수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길지 않은 그의 말 속에는, 퍽이나 많은 논란거리들이 함축되어 있다. 손 교수를 지배하고 있는 윤리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의 윤리담론을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정리해야 하는지를, 필자는 손 교수의 저서들과 인터뷰 내용들을 정밀 분석함으로써,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심층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과 같은 교회와 좌파의 대립구도 속에서 좌파 쪽에서 교회를 마음껏 공격하고 조롱할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하고 있는 손 교수의 행각과 발언을 엄중하게 재평가해야 한다. 그가 한국교회의 윤리교사인지 파괴자인지를 냉철하게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손 교수 같은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이 아니라, 이정훈 교수처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의 관점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의 문화전략과 정치논리를 분석하고 해체하면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영성과 지성을 갖춘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2)

 

1.교수의 일련의 발언들의 의미를 한국교회는 정확하게 해독해야 한다.

손봉호교수의 시사저널 인터뷰 내용을 읽은 후 온몸이 떨려오는 격렬한 분노랄까, 이런 감정적 반응이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때 내 속에서 외치고 있던 소리는 여러 갈래였다.

(1)손봉호교수는 누구인가? (2)‘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고 단정하는 그 발언에는 어떤 의미의 층위들이 깔려 있는 것인가? (3)도대체 왜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독한 독설을 한국교회를 향해 퍼붓고 있는 한 사람의 장로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개신교 역사상못지 않은 강도의 비판을 보여주는 또다른 그의 발언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망해야 한다는 극언도 있었다.

손 교수는 그나마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망해야 한다는 강한 표현을 써가며 한국교회가 이대로 계속 타락하고 약해져서 아무런 특혜도 누리지 못할 때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손 교수는 소수의 선한 목회자들에게 한국교회의 개혁을 기대해볼 수 있겠지만 이들은 한국교회가 완전히 망한 뒤에 그루터기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망해가는 교회의 청소부 역할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표현으로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을 진단했습니다. 손 교수는 이어, 이들조차도 한국교회가 어지럽다는 이유로 한국교회 전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의 목회에만 몰두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며 날선 비판을 이어갔습니다.”(노컷뉴스 2019.7.10.)

손봉호 교수의 위의 발언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게 되었다.

(4)손봉호 교수는 자신의 저서들 여러 곳에서 예의를 강조하고 있던데, 정작 그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 너무 예의가 없지 않는가. 예수님 대신 자신이 교회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서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저렇게 참혹한 수준으로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해 권면하고 경고하실 때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그렇다면 손봉호 교수는 예수님 위에 있는 사람인가?

(5)손봉호 교수를 저렇게 발언하게 만드는 사고 혹은 가치체계는 무엇인가? 그 정체를 밝혀내야 한국교회가 그에 대해 대응할 수 있지 않는가? 그 정체는 어떻게 밝혀낼 수 있는가?

(6)한국교회의 멘토’, ‘원로라는 얼굴, ‘정직’, ‘청렴등의 도덕군자로서의 얼굴, 한국교회와 한기총에 대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잔뜩 찌푸린 얼굴, 그리고 서울대학교 교수 경력 등에서 나타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얼굴, 기윤실 성서한국 같은 사회단체를 통한 사회 활동가로서의 얼굴, 이런 그의 다면적 얼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진짜 얼굴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그에 대해 합당한 대응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 책(지금 집필중)을 쓰게 된 동기는 위의 여섯 가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런 내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봉호 교수 표현에 의하자면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이자 완전히 망해야 되는교회 목사로서 이 땅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가 어떤 연유든간에(물론 나도 일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음란과 탐욕과 불법을 지극히 개탄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교회라는 보편 교회를 향해 극언을 일삼는 손교수의 행태를 그냥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고, 한국교회가 그런 그의 행태를 거의 방치하고 있는 불편한 현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손봉호 교수의 다면적 얼굴들

매우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보여주고 있는 손봉호 교수의 초상은,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얼굴들 조각들이 서로 잘 맞춰지지 않는 퍼즐처럼 보인다. 신학을 이수한 장로로서 협동 설교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비판을 해대는 독설가이며, 기윤실 성서한국 등을 통해 좌편향적 활동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보수 중의 보수라고 알려진 고신교단 소속 고신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있다는 사실 등등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어 도저히 끼어 맞출 수 없는 퍼즐 게임 같은 다면적 얼굴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분당우리교회 정진영 목사가 동성애는 대세라는 발언을 설교 중에 해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거기다가 담임목사인 이찬수 목사가 과거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 함께와 같은 책의 제목을 설교 중에 언급했던 사실로 인해 좌파라는 댓글공격까지 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이찬수 목사가 정진영 부목사의 설교에 대해, 동시에 자신이 신영복 교수의 책 제목을 언급한 사실에 대해 해명하는 설교 결론 부분에 손봉호 교수의 책을 인용한 사실 자체가 손교수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원래 인용은 인용 그 자체가 정치학적 의미를 갖는다. 보통의 경우 인용은 인용 대상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기대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 시비와 좌파 시비가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이찬수 목사가 손봉호 교수의 책을 인용한 것 자체가, 그것도 설교 거의 막바지 결론 부분에 이르러 인용한 것 자체가 손봉호 교수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 내용을 들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찬수 목사가 손봉호 교수의 책의 일부 내용을 인용한 정치학적 목표는 분명하다. 두 가지 논란과 시비를 손봉호 교수라는 권위를 내세워 차단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이자 한국교회 차세대 지도자급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의 저서를 인용해 설교의 결론을 삼을 정도로, 손봉호 교수의 위상은 한국교회 안팎에서 실제적이다. 이찬수 목사는 설교 중에 존경하는 어조로 한국교회의 원로이자 어른이라고 손교수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찬수 목사는 마태복음 2323-24,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손봉호 교수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이 본문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예수님이 낙타에 비유했던 정의와 긍휼에 힘을 기울였다면 그때 누렸던 도덕적 권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하루살이같은 동성애와의 싸움에도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건국 후 상당 기간 개신교만 군목을 보냈는데도 다른 종교와 사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독교가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서 기독교가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너나 잘하세요 야유만 받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낙타와 하루살이를 구분하고 낙타에 집중해야 하루살이를 구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찬수 목사는 손봉호 교수의 말을 스타카토로 한 음절 한 음절 또렷하게 끊는 듯이 강조하며 인용한다-필자 주) 정직하고 공정해서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과 믿음을 돈 명예 권력 같은 하급 가치를 얻는 수단으로 착각하는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약한 자에 대한 긍휼에 사용하면 영적 전쟁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맞다. 나도 깊이 공감한다. 나도 한국교회의 불법과 타락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설교의 서두에서 이찬수 목사는 적군보다 무서운 아군의 오인 사격을 강조하면서 정진영 부목사의 실수를 마구 공격하고 자신을 좌파라고 공격하는 세태를 탄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동성애 발언과 좌파 논란과 관련한 댓글 공격들이 보여주는, ’내부 총질의 문제보다도, ’한국교회의 원로이자 어른이라고 불리는 손봉호 교수가 한국교회에 했던 독설들을 다시 상기하게 되면서 적군보다 무서운 아군의 확신 사격‘, 혹은 적군보다 무서운 아군의 확인 사살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되면서, 더욱 무거운 마음이 되었다. 아니면 혹시 그가 아군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3.‘기독교 윤리윤리 이데올로기를 분별해야 비로소 손봉호 교수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

손봉호 교수는 지상교회, 인간 공동체는 타락한 죄인들이 모인 곳으로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도덕적 완전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치 그는 자크 라캉이 말했듯이 타자의 눈빛, 곧 신의 불꽃 같은 눈빛, 영혼을 뚫어보는 무서운 눈빛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조금만 죄가 있고 허물이 보여도 가차 없이 심판하고 정죄하는 완전주의자다. 그리고 모세의 자리에 당당하게 앉아 호통치는 그의 앞에서 한국교회는 그가 아무리 극언을 해도 묵묵부답 죄책감으로 인해 자책하며 침묵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구조는 퍽이나 잘못된 것이다. 손봉호 교수의 윤리에는 복음이 완전히 빠져 있다. ‘윤리교리와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그 윤리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복음이지 윤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정죄의 율법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율법으로 한국교회를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21세기 모세다. 굉장히 지당한 말씀인 듯 보이지만 그의 논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아니 자신이 하나님이다. 자신이 한국교회를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다. 뭔가 크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손봉호 교수도 잘못되었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도 잘못되었다.

손봉호 교수에게는 기독교 윤리가 없다. 기독교 윤리가 사회윤리의 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근본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손교수는 탐욕과 불법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를 윤리적으로 비판하면서, 한국교회를 정죄하는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한다. 그러니까 그의 윤리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이렇게 볼 때 손교수의 한국교회에 대한 극언들,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다는 발언, 그리고 한국교회는 망해야 한다는 극언 등은 손교수가 한국교회를 죽이기 위해 설정한 전략적 프레임이다. 한국교회를 타락멸망이라는 인식의 덫에 가두기 위한 목적으로 손교수는 그런 발언들을 전략적으로 구사한 것이다. 그의 프레임과 그의 윤리 이데올로기는 밀접하게 상응하고 있다. 후자는 전자를 낳고 전자는 후자를 강화시킨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 윤리의 담보자가 아니고 그의 준거틀이라고 볼 수 있는 성서한국의 극좌적 가치를 담보로 한 이데올로기스트(ideologist)이다. 나는 그가 원리적 무신론자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손봉호 교수는 그냥 그를 인용만 해도 그의 권위를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그를 인용한 사람을 위한 방어막이 펼쳐지고 논란이 종결되게 만드는 그런 신비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내 원수는 용서해야 하지만 내 이웃의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윤리가 좌파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것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내 이웃의 원수는 계급투쟁 개념이다.

한국교회는 손봉호라는 코드를 아주 조심스럽게 해독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찬수 목사가 그의 설교에서 자신과 자신의 교회를 방어하기보다는, 되려 한국교회 전체를 공격하는 양상을 보인 것은 그가 손교수의 프레임윤리 이데올로기라는 낙타를 무심코 삼켰음을 잘 보여준다. 그가 손교수의 프레임으로 한국교회를 전체적으로 탐욕무례등의 개념으로 융단폭격을 퍼부은 후에, 돌연히 회개를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설교의 초점을 돌리고자 했을 때 나는 몹시 힘들었다. 손교수의 프레임에 갇혀 손교수의 이데올로기로 한국교회를 실컷 비판한 후 회개하라고 하면, 도대체 그 회개의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동성애와 좌파 시비를 일으킨 댓글 부대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회개하란 말인가? 그러면 분당우리교회와 이찬수 목사와 정진영 목사는 탐욕무례의 한국교회에 의해 억울하게 핍박당하고 모함을 당하고 있는 순교자라도 된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그 순간, 나를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교수는 성경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윤리는 성경적인 교리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손교수에게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라는 미명의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그는 한국 교회를 폄하하고 그 존재 자체를 깡그리 부정하기 위해 프레임을 뒤집어 씌웠다. 그는 윤리 이데올로기의 부름을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이데올로기스트다.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뱉어 내는 말 속에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면 필자가 보기에 손교수는 교회 에 있지 않다. 손교수는 한국교회를 해체하려고 하고 있지만, 조금 유치한 비유가 허락된다면, 절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중이 떠나야 한다. 한국교회는 손교수를 분별하고 분리해야 한다.

손봉호라는 기호는 손봉호 교수 특유의 논리로 코드화되어 있다. 그의 코드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해독해야지, 그런 과정 없이 그의 말을 인용하고 그를 의지하면 손교수의 코드 안에 있는 논리들이 인용한 사람의 말과 삶에 자동적으로 디코드화된다. 이찬수 목사의 설교 내용이 바로 그런 경우다. ‘손봉호라는 코드는 윤리 이데올로기프레임이라는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해독해야 한다. 순진하게 손봉호라는 기호를 기독교 윤리로 착각하고 덥석 물면, 바로 그 덫에, 프레임윤리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 당분간 혹은 영구히 헤어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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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졸저, 여호와김왕의 면도칼(세컨리폼, 2015) 참조.

2)201961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고>

3)여기서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가져온 것은 이 글을 이야기 식으로 끌고 가려는 글쓰기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하면 된다. 설교할 때 예화를 도입하는 그런 방식이라고 보시면 될 것이다. 사실 교회 홈페이지에 설교를 올리는 것 자체가, 그 설교를 텍스트, 즉 해석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커뮤니케이션 행동이다. 성경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지만 설교 텍스트는 그렇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이찬수 목사의 이 설교는 문제를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확산시킴으로써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예민한 쟁점들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직면하게 만드는 중층적 텍스트가 되었다.

4)‘윤리교리의 상관성,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해 신문 지상에서 복잡하게 설명하기는 무리인 듯하다. 혹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필자가 추후 출간할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5)예를 들면 이찬수 목사는 동성애 문제를 손교수와 같이 하루살이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 68혁명과 같은 세계 사상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이런 인식을 가지기는 힘들다. 한국교회에 68혁명의 사상사적 의미를 빌헤름 마이어 등의 성정치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정훈 교수는 단순한 초신자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주님께서 한국교회에 보내주신 21세기 사도 바울과 같은 존재다. 이정훈 교수는 법학, 신학, 종교개혁사, 한국교회사, 한국역사,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국제정치학 등등의 학제간 영역들을 넘나들며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는 희귀한 지성의 사람이다. 이교수 안에는 여러 분야에 능통한 학자들, 이론가들, 사회활동가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복음주의자다. 거기다 매우 열정적이며 학구적이다. 아마도 초대교회에 나타난 초신자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겠다. 초신자는 이방인 선교의 큰 획을 그은 선교사였으며, 나중에 베드로 사도도 책망했을 정도로 권위를 가진 사도가 되었다. ‘초신자는 결코 영적 등급 개념이 아니다. 개인적인 말을 보탠다면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주님께서 이정훈 교수를 회심시키신 사건을 접하고서부터 비로소 21세기 한국교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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