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수몰 고향마을 능선에 시(詩) 비석 세운 양한석(梁漢錫) 장로
대청호 수몰 고향마을 능선에 시(詩) 비석 세운 양한석(梁漢錫) 장로
  • 교회복음신문/한국기독타임즈
  • 승인 2020.11.2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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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엔 고향 향수와 비경 담은 시 한 편
실향민들 모여 비석 기념식 갖고 회후
양한석 장로가 세운  시 기념비석을 배경으로...
▲양한석 장로가 세운 시 비석 뒤로 대청호가 보인다.

은봉(恩峰) 양한석(梁漢錫) 장로는?

한국현대인물열전 33선 등재, 대한민국 인물대상 수상, 한국민족정신진흥회 3,1운동 100주년 한국인물사 등재, 미국 마퀴즈 2019년도 세계인물사전 한국인편에 등재된 바 있는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는 군전역과 함께 약관(弱冠)의 나이로 사업장에 뛰어들어 신진포장을 창업, 일취월장 성공의 길을 달려 왔지만 집안의 여러 상황으로 소위 가방 끈이 짧았던 그에게 사업과는 별개로 사회활동과 정치에는 언제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의지와 집념으로 불혹의 나이에 교회의 장로로서, 노회 총대로서, 초대 남구 기초의원, 남구의회 초대의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더 큰 꿈을 펼쳐 보겠다는 그의 비전 앞에 의외의 거대한 산맥이 가로막았다. 53세에 민자당 부산직할시 남구청장 후보경선에서 당선되고도 중앙위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하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그의 불출마와 함께 여당의 텃밭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민심의 냉정한 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짧은 가방 끈의 벽을 실감한 그는 불혹을 넘기고 50대 지천명(知天命)의 중반에 고입검정고시대입검정고시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한 해에 차례대로 합격하고 동의대학교 법정대학까지 합격했으니 수재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남구 구의회 초대의장을 역임하고 2대 부의장이던 그의 합격 소식은 중앙일간지 및 지방 일간지의 대서특필로 주목을 받았다.

기념비석 뒤로 대청호가 있다.
▲기념비석 뒤로 대청호가 있다.

졸업장을 따기 위한 대학 문 노크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그는 결석 한 번하지 않고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대학원(정치외교학과 석사, 박사)과정까지 10년의 늦깎이 공부는 얻은 만큼 잃어버린 것도 많았다. 더 큰 이상, 정치의 비상을 꿈꿨지만 10년이란 세월은 그의 자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정치 줄이 끊어지다보니 기대고 의지할 데가 약했다. 그는 끝내 정치 야망과 꿈과 이상을 접고 이를 달래기 위해 문단 등단을 목표로 문장을 구사(驅使)하는 능력, 필력을 키우기 위해 경일문화원 문예창작교실에 입문했다. 기나긴 시간 끝에 문예운동시부문 및 문학세계 수필부분 등단, 문학 금년에 부산광역시 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등단의 겹경사를 맞았다.

그는 불혹의 나이에 국민포장 포장(봉사부문)과 부산시장 표창장, 50대에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했으며, 스포츠서울 선정 기업 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 또 경영인으로서 모범적인 기업운영을 해 온 공로로 김해시장 및 김해세무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충청북도 보은군 출신인 양한석 장로는 충청문화 충북 출신 10대 기업인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제52회 무역의 날 ()에스이피 백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현재는 기독교의 숨은 봉사자 발굴과 함께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 주자는 의미에서 제정된 기독문화대상 및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방향 제시와 뜨거운 현안, 기독교의 비전 등 포럼을 통해 제공하는 ()21세기포럼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한석 장로의 고향인 광포1리가 대청호 담수 조성 때 수몰됐다.
▲양한석 장로의 고향인 광포1리가 수몰돼 조성된 대청호(보은군 일대)

국내 3대 호수 중 하나인 대청호의 넓고 푸른 물길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 일대가 수몰되면서 조성됐다.

그 중에 광포1(판장리) 60여 호가 수몰된 마을은 대전, 세종, 청주지역의 식수원인 대청댐 중상류에 속해 있었다.

이 마을은 차령산맥의 웅비하는 기상의 국사봉을 가까이 두고 금강을 지루로 둔 천혜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지형이 널처럼 늘어섰다고 해서 늘개미라 불렸다. 대부분 산악지역으로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됐다.

수몰된 마을 능선에는 기념비 두 개가 조성돼 있다. 하나는 광포1리 실향민들로 구성된 유래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세운 회남면 광포1리 유래이며 또 하나는 수몰 지구 내 고향이라는 제목의 시인 양한석 장로가 세운 비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지난 118일에는 실향민들이 모여 간단한 기념식을 가졌다. 참석자 대부분은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마을 주민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지 윗동네? 아랫동네? 김 아무개? 이 아무개? 박 아무개? 동생, 형을 연신 불러 가면서 퍼즐을 맞춰 갔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광포1리 실향민들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 비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광포1리 실향민들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 비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시 한편을 비석에 새긴 시인 양한석 장로가 두메산골, 수몰지역 실향민이라는 사실에 개천에서 용났다는 옛말이 딱 맞았다.

이날, 은봉(恩峰) 양한석(梁漢錫) 장로가 젊음을 무색케 할 열정과 불굴의 의지를 담고 출간한 자서전 아직도 꿈꾸는 사랑과 동행이라는 산문집과 칼럼집, 산문집, 시집 두 권을 친필 사인을 해가며 증정했다.

군 입대와 사업으로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두메산골에 묻혀 살아갈 뻔 했던 양 장로를 위대한 인물 사전에 등재될 만큼 대변화를 가져 오게 했던 것은 처외삼촌과 장모가 설립한 회남교회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였다.

양한석 장로는 예수님을 믿게 된 배경을 간증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하려다 보니 형님이 병원에 6개월 있는 통에 가산이 탕진돼 진학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한학을 익히기 위해 마을에 있는 되목서당에 다녔죠. 당시 머리가 좋아서 천재라고 해서 잔치상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가 뭔지도 모르는 내게 선배 한 분이 교회 나가자고 해, 15리나 떨어진 교회에 가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교회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열심을 다하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지금의 아내 김광자 권사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죠. 17살에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내게 성경말씀은 힘과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벽예배를 갈 때면 늘개미 언덕에 놓여있는 상여집도 지나야는데, 무섭지도 않았으며 찬송을 부르며 다녔습니다.

어느 날, 정월대보름이 되면 느티나무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데 그곳에 썩은 나무를 패다가 교회 가서 때고 했더니 동네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습니다.

저의 신앙과 믿음이 좋게 보였는지, 선교사님이 전도사님에게 믿음도 좋고 심성도 착하니 신학에 가서 목사가 되면 잘 하겠다는 권유를 받고 가족들의 허락을 받아 충북노회 산하 보은성경고등학교를 거쳐 대전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속리산에서 스님들이 오면 통이 커서인지 봉양을 많이 했는데, 스님들이 저를 보고 큰 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해 맘 아파하셨던 어머니께서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군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육군경리학교에서 2등의 성적으로 부산 항만사령부 경리과에 배속됐습니다.

예산을 반납하고 수령하는 일을 했는데, 병장 달고 문현중앙교회(, 새마을교회)를 가니 충청도 고향사람들이 여럿 있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신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안 김영오 장로님이 저를 불러서 제대하고 뭐 할 것이냐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목사가 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사업을 해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것도 좋지 않은가? 내가 포장사업을 하는데 몸이 아파서 누군가에게 물려줘야하는데, 사업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았죠.

어머님과 형님들과 상의해서 전역 후 2년 반 일을 함께 하다가 사업체를 인수하고 사상공단에 제일 먼저 금성사 부라더미싱, 대한도자기, 동산유지에 납품을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장유에 수천 평의 땅을 구입하고 번창을 거듭했죠. 사업열정 못지않게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 37세에 장로가 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17세에 교회를 처음 다녔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지금의 아내를 10여 간의 외지생활임에도 결혼에 이른 사연이 궁금했다.

주일학교교사일 때 만났죠. 제가 신앙이 좋으니까 주변 분들이 도와 주셨습니다.

교회를 나오던 형님에게 암호로 편지를 써서 주면 김 권사에게 건네주고 몇 년을 그렇게 했죠. 형님이 메신저 역을 해 줬습니다. 군 입대와 사업으로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편지와 가끔씩 고향에 들를 때면 만나서 사랑을 이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준 짝이라고 봅니다. 대전신학교 총장님의 주례 하에 제가 27, 아내가 24살에 결혼을 하게 됐죠.”

양 장로는 자녀들 자랑보다 손자 자랑이 컸다.

자녀는 21녀인데, 장남은 서울대학교와 샌디아고 주립대학서 공부하고 제 사업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부산대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둘째도 저의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며 포스코 및 대기업 납품하기 위한 일과 가업승계를 위한 절차를 하고 있습니다.

큰며느리는 MBC아나운서 출신입니다. 손자가 초등학교 대 오바마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고등학교 때는 트럼프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고등학교에서 줄곧 1등상을 놓치지 않았으며 현재는 뉴저지주립대학 의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꿈은 하드대 교수랍니다.

대청호 수몰 고향에 시 기념비석을 세운 양한석 장로가 교회복음신문 칼라판 전면에 걸쳐 소개됐다.
▲대청호 수몰 고향에 시 기념비석을 세운 양한석 장로가 교회복음신문 칼라판 전면에 걸쳐 소개됐다.

큰아들 둘째 손자는 선생님의 권유로 요트선수가 돼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획득, 대학 특기생으로 진학 준비 중이며 둘째아들 손자는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의 성적으로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둘째 며느리는 현재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양한석 장로가 설립한 ()신진팩과 신진수출포장은 PP/PE팩과 골판지포장 업계서 선두주자로 비상하고 있으며 포장업체로는 부산에서 세 번째로 크다.

장유에 3,500평 진례면 고모리에 3,800평의 공장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은봉(恩峰) 양한석(梁漢錫) 장로는 꿈이 없던 제가 교회를 가면서 꿈을 갖게 됐다그래서 우리 집 가훈은 꿈을 갖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고 가훈을 소개했다.

인터뷰 / 교회복음신문 김성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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