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떠나보내며.../본지 김성원 사장
어머니를 떠나보내며.../본지 김성원 사장
  • 교회복음신문/한국기독타임즈
  • 승인 2020.04.07 11: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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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복음신문 사장 김성원 장로(예린교회)
교회복음신문 사장 김성원 장로(예린교회)

70년 전, 부잣집 장녀(나의 어머니)20세에 안동 인근 두메산골 가난한 교회 전도사와 결혼을 했다.

목사이신 아버님(94)이 예장통합 교단서 70세에 은퇴하시기까지 어머니(91)는 목회자 내조로 50, 동반자로 70년을 함께했다.

우리들을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을 시키는 내내 찌든 가난은 이어졌다.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린 시절, 배가 너무 고파 고운 흙을 모아서 먹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혼나기를 반복하다가 신장염으로 죽음의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목회를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3, 중학교 1, 고교 1회 등 총 다섯 번의 전학을 했었다. 친구들을 사귀려고 하면 헤어져야 했다. 전학에 의한 학교생활은 기존학생들에 의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사교술이 뛰어났던 나는 학교를 옮길 때마다 싸움이나 결투를 하지 않고도 반 학생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반 전체 학우들을 데리고 교회에 데려 왔을 때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시겠다고 어머니는 꾸지람 없이 라면과 국수를 끓여 주셨다.

교인들에게 책잡힐까봐 엄격하셨던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께서 내주신 치마폭은 언제나 보호막, 사랑으로 그득했다.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도시와 시골을 오간 초등학교 전학은 나에게 호기심을 일으켰다.

동생과 함께 감자밭에서 이제 갓 맺은 감자를 통째로 뽑아 농사를 망쳐 놓았던 일, 모판에 가득 모인 개구리를 잡기 위해 모판을 초토화 시켰던 일, 배가 고파 옆집 부엌에 들어가 찬장을 열고 닥치는 대로 훔쳐 먹었던 일, 그야말로 배고픔 속에서 신기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사고뭉치였다. 어머니는 호통 치는 주인에게 무릎 꿇어 싹싹 빌었다. 어머니가 변상을 했다.

화가 나신 아버지에 의해 비오는 날, 동생과 함께 발가벗긴 채로 사택마당으로 쫓겨났다. 비가 오고 추워서 교회 안 강대상 안에 들어가 쪼그려 자다가 강대상을 쾅쾅 내치는 아버지의 설교에 놀라 깬 적이 있다.

육성회비를 못내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두려워 학교 빠지기가 부지기수였다. 학교를 간답시고 양지바른 곳에서 숨어 지내다 귀가를 했다. 아침이면 회비를 조르는 내게 어머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인지 연신 눈물을 보이셨다.

장로가 담임이었지만 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내게 학생들 앞에 창피, 회초리는 곤욕이었다. 학교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어머니가 장로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하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중고교 생활이 가난의 연속이었다면, 이후 부산으로 임지를 옮기신 아버지의 목양은 그야말로 못된 장로들의 등쌀에 의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장로교라서인지 당회권위는 대단했다. 사투리에 트집을, 성경봉독 시 글하나 틀리다며 트집을, 적당한 타협을 모른다면서 트집을 일삼았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서인지 타협이 없었다. 직분자들이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곧바로 책망이었다. 어머니는 당회가 끝나고 아버지가 집으로 오실 때까지 가슴 졸이며 기도하셨다. 시무장로 아들이 타교단 부목사라, 아들을 데려오고자 온갖 이유를 달아서 아버지를 내쫓았다. 결국 8개월의 무임(사례비 주지 않음) 끝에 아버지는 포항 구룡포의 어촌마을 덕성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가슴 졸이며 목회 내조를 해 오셨던 어머니는 60세가 되던 그해에 결국 침례병원에서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고, 빠른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얘기를 듣게 됐다. 수술비가 많이 드는 관계로 어머니는 이대로 살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가겠다.”며 끝내 수술 대신 약으로 치료를 이어갔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올랐다. 그럼에도 은퇴이후 주일이면 은목교회(정관서 덕포동 왕복)서 예배드리는 것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1년에 성경을 3회나 통독할 만큼, 기도와 성경 읽는데 시간을 보냈다.

이후 어머니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으로 31년을 더 사시다가 지난 2020310() 1250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건강하셨던 어머니를 잘 봉양해 보려고 했더니 형편이 안 따라 줬고, 형편이 좀 나아져서 제대로 봉양을 해 드리려고 했더니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끝내 불효자로 남았다.

나는 목회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인지 장로가 목사를 쥐락펴락하거나 맘에 안 들면 쫓아내는 못된 장로의 모습을 보면서 중1 입교 시 크면 어떤 인물이 되고 싶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목사만 빼고 무엇이든 되겠습니다.” 라고 답한 적이 있다. 못된 장로들의 등쌀에 어머니는 늘 가슴 졸여왔으며 심장판막증이라는 병에 시달려야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장로가 돼 목사님을 잘 모시겠다.”는 다짐이 나의 뇌리를 늘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가진 천국환송식이 세상의 이별보다는 가난의 극복, 못된 장로들의 등쌀, 낯선 시골로 전학 와서 배고픔 속 호기심과 신기함에 저질렀던 사고뭉치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꿇어 앉아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떠올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엄마라고 불러 봐도 답이 없다. 연세가 드셔도, 병원에 누워계셔도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으련만... 천국에 가신 어머니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훤히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니, 기도의 든든한 버팀목이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이 두렵고 걱정이다. 그동안 어머니의 기도 빽으로 간간이 잘못도 용서 받고 무탈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천국환송 후 딱 2주 만에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만남의 감동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곁에 자고 있던 아내가 왜 소리 내어 우느냐고 깨웠다. 아내가 지켜보는 창피함도 잊은 채 깨어나서도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를 보내는 아픔과 슬픔은 누구나 겪거나 겪어야할 일이다.

나도 이제 이별의 슬픔을 뒤로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교회 장로로서 섬김과 순종을, 교회복음신문 사장으로서 이단사이비 척결과 교회를 해롭게 하는 자들을 척결하는 사명에 더욱 충실 하는 것이 천국에서 내려다보실 어머니의 바람이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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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성 2020-04-07 21:44:39
은혜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김영근 2020-04-07 19:06:24
할렐루야! 장로님의 어머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 장로님,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