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
신앙간증/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
  • 교회복음신문
  • 승인 2019.08.18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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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예린교회(김성대 목사)서 신앙간증 했다.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예린교회(김성대 목사)서 신앙간증 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신앙간증/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김미애(50), 수영로교회 집사이며 오랫동안 교회학교 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왔다.

지천명을 넘어 50세에 이른 중년 여성 김미애 변호사는 미혼으로서 아이를 입양하고 조카를 키우고 있다. 그 시작은 어릴 적 암 투병하던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외로움을 극복해야했던 유년시절, 형부의 갑작스런 사고, 19개월 된 조카를 바라보는 심정, 대전에서 어린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소식, 변호사를 하면서 만난 부모가 있거나 없거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로 인해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잉태하게 됐다. 입양결심의 이유이기도 하다. 태어난 지 80일 만에 입양해서 키운 아기가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됐고, 초등학교 4학년 때 키운 조카는 고3이 됐다.

김미애 변호사는 포항시 구룡포 하정리에서 태어났다. 엄마의 병을 낫게 해 달라며 새벽예배까지 다니며 기도했던 초등학교 어린아이의 지극정성, 모녀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심지어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리어카에 태우고 교회에 다녔다. 어머니는 4년을 투병하시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천국으로 떠나셨다. 외로움과 가난, 힘겨운 삶, 앞길이 막막했던 김미애 변호사는 포항여고를 진학했지만 언제나 차비와 도시락도 없어 외로움에 우울했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교장선생님과 친구들의 격려에 오히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직접 돈을 벌어 공부하기 위하여 주말에 고향에 온 친구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꿈과 희망을 키웠던 학창시절은 힘겨운 노동과 도시생활에 젖어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10대를 방직공장, 봉제공장에서 보내고, 20대를 회사원, 식당운영 등으로 돈을 모으던 중, 어느 날 교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29세 늦깎이에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실이었다.

때론, 너무 냉철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내면에는 아이들 사랑,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등 언제나 약자 편에 서서 변호하는 따뜻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김미애 변호사가 자신의 삶을 나누고자 예린교회(김성대 목사)에서 간증했다.

김 변호사는 간증 내내 내가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라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감동에 흠뻑 빠진 성도들이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본지는 김미애 변호사의 간증 일부분을 지면으로 옮겨봤다.

문화교실을 찾아 어르신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문화교실을 찾아 어르신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

저는 요즘 나라걱정이 많은데 돌이켜보면 제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꿈을 이루고 살아올 수 있었음이 감사합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건국의 아버지들과 마음만 먹으면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축복이라 여기며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특별히 제가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욥기 238~10절 본문 말씀을 나누게 된 이유도 욥기서 말씀이 제가 힘들 때 큰 위로가 됐기 때문입니다. 너무 외롭고 괴로운 순간, 아무리 돌아보아도 주님이 아니 계신 것 같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오직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단련시켜 그 분이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순금을 만들기 위함인 걸 경험했기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무시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늘 혼자인 것 같은 절대 고독의 순간에도 주께서는 단 한순간도 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제가 혼자인 줄 알고 마음대로 살아가던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늘 저를 잡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의 등 뒤에서 혹은 옆에서 어떨 때는 제가 정말 못 깨달을 때는 어떤 사건으로 저를 깨우쳐주시는 그런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을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만나길 소망합니다.

저의 유년시절은 참 행복했습니다. 저는 포항시 구룡포읍 하정1리라는 앞에는 바다, 옆으로는 들, 뒤로는 산이 있는 그런 아름다운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요즘 같은 여름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았습니다. 피부가 까맣게 타서 아프리카 흑인 같은 모습이었지요. 배고플 때는 집에 가서 삶아놓은 옥수수 하나먹고 다시 나와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았고, 봄가을에는 들과 산에서 놀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땔감으로 나무가 대부분이었어요.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를 못 하겠지만 겨울되기 전에 겨우내 쓸 나무를 가득 해 둬야지 겨울 한 철 마음이 놓이잖아요. 부모님이 산에 나무하러갈 때 저도 같이 가서, 그 때 산토끼가 뛰어가면 그거 잡겠다고 뛰어다니며 마냥 놀았으니 공부를 했겠습니까? 노는 게 최고였고 그래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 시절이 마냥 자유롭고 행복했는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김미애 변호사는 시간을 쪼개어 어르신들 섬김과 장애인 섬김에 봉사의 손길을 펴고 있다. 사진은 해운대나누미 참!좋은 사랑의 밥차 자원봉사
▲김미애 변호사는 시간을 쪼개어 어르신들 섬김과 장애인 섬김에 봉사의 손길을 펴고 있다. 사진은 해운대나누미 참!좋은 사랑의 밥차 자원봉사

2 , 전부였던 어머니 천국가다

어머니께서 정말 성실하셨는데 제가 엄마기질을 닮았습니다. 초등5학년 때 어머니가 하혈을 많이 하셔서 병원에 가셨는데 돌아오시질 않는 거예요. 아버지만 돌아오셔서 시간이 좀 걸린다. 집 잘 돌보고 있어라고 말씀하시곤 어머니 옷가지를 챙겨가셨어요. 그런데 그 집 잘 보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개3-50여마리를 키워야 했고요. 우리 집은 흙집에 대문도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는 산이 있었고요. 아시겠지만 그 시골에 무슨 가로등이 있었겠습니까? 겨우 전기 들어왔었는데, 밤에 보면 나무가 사람같이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대문도 없는 집에 누가 오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밤에 잠 잘 때마다 늘 치한이 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두려운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 때 저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엄마가 안 오시니까 어린 생각에 아! 큰 병이구나 생각하고 뭘 했냐면요. 마당에 물 한 그릇 떠 놓고 빌었습니다. 모든 신들을 소환했어요. “산신령님! 용왕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우리엄마 큰 병이 아니게 하고 빨리 나아서 돌아오시기를... ” 그렇게 기도를 하고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40여일 후에 돌아오셨는데 나갈 때는 씩씩하게 걸어가셨으나 돌아올 때는 거동을 잘 못하셨습니다. 암 말기였습니다. 이미 수술도 안돼서 방사선 치료를 받다가 안 되니까 집으로 가라고 해서 오신 거예요. 몇 개월을 못사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제가 막내인데 저를 보니까 기가 막히잖아요? 어린 딸을 두고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그 때 엄마는 예수님을 모를 때라 절에 가고 굿도 하고 별별 걸 다 했어요. 그래도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안 해본 게 교회 가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게 교회 가자고 제안한 게 82년도였어요. 수요예배 때 처음으로 교회를 갔어요. 근데 교회를 가니 뭐가 좋았는지 아세요? 기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너무나 막연하였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교회 다닌 이후로는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거 그건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여러분 구역예배 하시죠. 저 같은 초등학생은 안 가잖아요. 저는 우리 집 대표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집사님 권사님들이) 저를 끼워주셨어요. 똑같은 인격체로 봐 주셨고 기도도 순번대로 할 때 저도 순번대로 기도하고 했습니다.

새벽예배도 가고요. 오로지 엄마 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는데 근데 감사하게도 엄마는 기력을 조금 회복하셨어요. 조금씩 걸어도 다녔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아~ 예수님이 나를 낫게 해 주겠다는 믿음이 크셨던 것 같았어요. 어머니의 신앙은 상당히 기복적인 신앙이셨던 것 같아요. 오로지 본인의 건강회복을 위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엄마를 위해서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시골에는 대중교통이 거의 발달되지 않았죠. 80년 초반이라서 그렇잖아요. 버스도 1시간 반마다 한 대오고, 신작로잖아요. 택시는 읍내에 한 대 밖에 없어 가난한 우리 집에서는 교회가기 위해서 택시를 부를 처지가 못 되니 엄두를 못 냈죠. 엄마의 유일한 낙은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건데 겨울 농한기 때는 시골교회마다 부흥집회를 했거든요. 저는 엄마를 리어카에 태우고 교회에 갔어요. 40분을 갑니다. 예배당에서 우리엄마는 맨 앞자리에 누워계셔야 했고, 저는 그 옆에 앉아서 얼마나 간절히 예배를 드렸는지 몰라요. 그 이유는 목사님 같은 부흥강사의 눈에 좀 띄어 보려고.. 그러면 안수기도 해 주시잖아요. 그때 우리엄마 안수기도 좀 받게 해 보려고... 그렇게 정성을 다 해서 예배를 드렸고 본 교회 뿐만 아니라 이웃에 있는 교회 일곱 군데를 순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도원 추억이 참 많습니다. 정말로 나무가 뽑힐 때까지 기도하면 응답해주실 줄 알고 그 꼬맹이가 바위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엄마는 차츰 회복되어서 걸어 다니셨어요. 그래서 저는 성경에서 있었던 그 역사가 현재 일어났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엄마는 4년을 더 사시다가 제가 중2 때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신앙을 키우기 위함인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주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제게는 신앙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우리 부모님은 아버지가 돈을 가지고 와서 비교적 큰 항구가 있는 구룡포에서 생활했습니다. 배 사업을 하다가 망해버렸어요. 망하고 빚만 남긴 채 도망갔다가 다시 오셨거든요. 너무나 가난한 상황에서 제가 꿈꿀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골에서는 대학교에 가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저의 환경에서 기도만 하면 그려졌던 영상이 있어요.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인터뷰하는 장면이었어요. 마이크를 갖다 대고 저한테 인터뷰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제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입니다. 그래서 저는 벅찼습니다. 끝까지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기도만 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저는 100프로 신뢰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갔지만 참고서를 하나 새 걸로 사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토요일이면 학교마치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기도만 하면 그 그림이 보여지고.. 저는 그 그림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 시골에서도 늘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책상도 하나 없었습니다. 평상에 앉아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는 의사가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명 대학을 목표를 두고 기도를 했고 첫 번째 관문이 고등학교를 잘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포항에서는 포항여고가 우수한 학교였거든요. 포항여고에 합격을 했지만, 입학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중3 겨울 방학 동안에 양산에 가서 캔 만드는 공장에 가서 선별하는 일을 하다가 입학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를 서너 번은 타야해요. 게다가 우리 집에서 읍내까지는 새벽에 버스가 없습니다. 최소한 5시 반에는 일어나서 읍내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차비가 있어야 되는데 차비가 없었습니다. 늘 저는 이웃집에 차비를 빌리러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근데 시골이 다 어려웠잖아요. 50여 가구되는데 전부다 힘드니까 저한테 돈 빌려 주실 분이 없었죠. 게다가 우리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아니까 빌려주셨는데 엄마가 안 계시니까, 나중에 변제받을 가능성이 없으니까 안 빌려 주신 거예요. 그 상처가 너무 컸습니다. 그런데 주말에 교회가면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제게 주셨어요. 그걸로 조금 다니고 했어요. 근데 제가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매일 학교에 가서 자리에 붙박이처럼 앉아는 있지만, 내일은 어떻게 해서 이 학교에 올까 고민인거예요. 도시락도 못 싸갖고 다니지 점심은 굶고 친구도 없이 늘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집중을 잘 하는가가 공부를 잘 하는 비결인데, 머릿속에는 내일 어떻게 학교를 올까 고민을 하니까 공부를 못하는 거예요. 저는 점점 우울해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 반 학생들이 모금한 돈을 저한테 주었는데, 이 사실을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참 고마운 일이었으나, 사춘기인 저로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겁니다. 평소 제가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있을 때 말을 건네주는 친구가 더 좋은데...이렇게 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겠나 싶었습니다. 가난에 찌든 저는 학교 공부를 하기엔 맘과 몸이 지쳤습니다.

김미애 변호사가 교회복음신문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권익위 소관 사)부패방지국민운동총연합 원덕호 상임대표로부터 부패방지 청렴인 인증패를 받았다.
▲김미애 변호사가 교회복음신문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권익위 소관 사)부패방지국민운동총연합 원덕호 상임대표로부터 부패방지 청렴인 인증패를 받았다.

부산생활 10대 여공, 20대 자영업

그러던 중 19855, 비가 오는 날, 중학교 졸업 후 부산에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 중 저랑 친한 친구가 고향집에 온 거예요. 저는 그 친구들을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 때 함께 교회 다니던 친구 대여섯 명이 찾아와서 저를 안고 엉엉 울었어요. “어떻게 니 같이 공부 잘 하는 애가 왔냐?”는 거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친구들이나 저나 같은 처지인데 말이죠. 저는 그 동안 외로움 속에 지내다가 비로소 저를 공감해주는 친구들을 만나니 마냥 좋았고, 그 친구들을 따라 갔어요. 그곳이 바로, 반여1동 소재 태광산업 인거예요. 거기에는 수백 명의 십대여공들이 있었어요. 그 여공들은 3교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공장,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공장 일을 마치면 이미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산업체학교로 갔다가 그 버스로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일을 힘들었지만 포항여고 1개월 동안 너무 우울했던 저는 비로소 나를 공감해주는 친구들을 만나 너무 좋은 거예요. 친구들 따라 공장에도 가고 학교도 같이 다니면서 공부를 멀리하며 많이 방황을 했습니다. 꿈을 잃어버린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간노동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 꿈에서 점점 멀어지는 현실 속에 방황과 갈등이 심했지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야근 때 화장실에는 졸고 있는 공원들이 많았는데, 저 역시 그랬지요. 제가 중학생 때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교수님의 에세이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꿈을 잉태하라 그러면 해산하리라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제가 그걸 늘 가슴에 담았어요. 꿈을 가져야 하는데 그래야 해산도 하는데... 전혀 꿈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십대 아이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갈등과 고뇌를 화장 벽에 낙서를 해 놓은 거예요. 누군가가 그 낙서를 보고 그 범인이 나란걸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그분이 저한테 관심을 가지면서 늘 꿈을 잃지 말라며 퇴근길에 경구를 써서 편지처럼 제게 주면서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어긋난 길로 가지 말아라고 하나님이 순간순간 저를 보호하셨다고 봅니다. 항상 돕는 천사들을 보내주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마치고 친구들과 노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어요. 야간노동이 견디기 힘들어서 어느 날 그 공장에서 도망을 쳤어요. 그때는 노동3권이 제대로 보장이 안 되었어요. 도망 나와서 낮에만 일하는 곳을 찾기로 했어요. 그래야 검정고시라도 쳐서 대학을 가겠다 싶었어요.

18살에 나와서 연산로타리 뒷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두 번째 구직을 한 거예요. 제 발로 찾아간 청화상사라는 봉제공장이었는데, 저 같은 십대여공들 백여 명이 일하고 있었어요. 와이셔츠를 만들어서 수출하는 공장이었어요. 제가 비교적 사교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잘 어울렸어요. 거기서 십대를 보냈습니다. 근데 철이 없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의 삶은 방향이 없었습니다. 공부는 해야겠고 하고 싶은 맘은 가득한데 안 되는 거예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부모님은 안 계시고 너무나 가난한, 아무 보잘 것 없는 제가 있는 거예요. 어릴 때 기도만 하면 그려지던 어른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도망도 못가고 17살부터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방황하였고, 20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세상적으로 살았었죠. 그러다가 빨리 돈을 모아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한 끝에 찾은 것이 관광가이드였어요. 그때는 일본관광객이 많이 오던 시절이라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죠. 일본어에 거의 미치다시피 빠졌어요. 잠꼬대도 일본어를 할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어요. 제대로 하는 게 없었어요.

그러던 중 당시까지 모은 1500만원에 1500만원을 빌려서 15평짜리 식당을 운영했어요. 실비초밥집이었습니다. 그때도 세상 두려울 게 하나 없었지요. 빌린 돈은 갚아야했고 모은 돈은 지켜야 했기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당시 식당을 하겠다고 했더니 주변사람들은 시작 전부터 망할 걸 걱정했어요. 저는 망할 걸 알면서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겠냐.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런 정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망하지 않고 성공하려면 식당은 맛있고 깨끗하고 친절하면 된다.’ 식당을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허리를 펼 수가 없을 만큼 일을 했습니다. 저는 그 경험을 20대에 했습니다. 90년대에 월200만 원 정도 벌었습니다. 차도 사서 폼도 좀 잡고 다녔지요. 그때 제 꿈이 해운대 특급호텔 하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도 마음은 공허했습니다. 어느 날 시장에 갔다 오는데 명륜동 지하차도에서 벽이 무너지는 걸 환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러다 죽겠구나생각을 했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그 후에도 한참을 그냥 지냈는데 제 집이 교회 바로 옆이었어요. 새벽종소리가 들려도 교회에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꿈에서 사탄을 만났어요. 9년간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제 목을 사탄이 조르는데, 사탄을 물리치는 대적기도를 하는 거예요. 어릴 때 신앙생활을 워낙 열심히 했었기 때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제 목을 조르던 귀신의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검붉은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꿈속에서 주님께 항복했습니다. 주님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나눔과 섬김의 자원봉사
▲나눔과 섬김의 자원봉사

다시 주님께로....

그 때가 941113일 주일 아침 940분인데,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내가 교회를 안가면 죽겠구나 생각하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간 거예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그날 밤 12시까지 울었어요.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가 다시 물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13시간을 교회에 있었어요. 오늘 성경본문 말씀과 같은 상황인거예요. 세상은 나를 멀리했으나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나를 놓지 않으신 거예요. 늘 나의 등 뒤에서 나를 기다려 주신 거예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꿈에서까지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도 식당을 여전히 운영하는데 손님들은 나의 변화를 모르잖아요. 이게 아닌데...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밤마다 많이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때, 오늘 성경 말씀이 떠올랐어요.

욥기 238~10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로지 예수그리스도께만 매이고 싶은 데 제 삶의 결과로 그럴 수가 없는 제 처지가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때 수영로교회 지하 기도실이 24시간 오픈되어 있었어요. 저는 골방 같은 1인 기도실에 매일 가서 울며 기도했어요. 그러다가 식당이 영업시간 자정을 넘겨 영업했다는 이유로 단속이 나와서 영업정지처분을 받았어요. 사실 영업을 한 것도 아니고 단골손님이 돌아가실 동안 청소를 하고 있었던 건데, 단속공무원이 부르는 대로 쓰라고 해서 썼는데 그게 자술서였던 것이죠. 그래서 영업정지1개월 처분을 받았어요. 그때 저는 법에 대해 무지했지요. 그런데 몇 해 전에 공적인 일을 하기 위해 범죄경력증명서 발급을 통해 1995년경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30만원을 냈던 것을 변호사를 하다가 알았어요. 돌이켜보니 그 때 그 영업시간 위반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변호사를 하면서 저처럼 무지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말을 놓치지 않고 더 잘 듣고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저의 그러한 경험들을 헛되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달 동안 영업을 못했는데 저는 오히려 기뻤어요. 마음껏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기도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흘간 금식을 하고 내려와서 가게를 처분했더니 3천만 원정도 남았고, 거기서 십일조를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962월 공부를 하려던 제 맘에 성경부터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2일 만에 1독을 하고 3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죠. 그해 여름에는 단기선교도 갔었습니다. 제 맘대로 살아봤잖아요. 불행한 삶이예요. 주께서 살라고 하는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미래 직업에 대해 기도했습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회에 유익한 직업이 뭔지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수능을 치고 성적이 발표되기 전날 밤에 법대를 가서 법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때 저는 사법시험 과목이 뭐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인도에서 부산을 방문한 현지 학생들과 함께 해운대에 설치된 열기구(대표 전광일)를 탑승했다.
▲인도에서 부산을 방문한 현지 학생들과 함께 해운대에 설치된 열기구(대표 전광일)를 탑승했다.

늦깍이 야간 법대생이 사법시험 합격하다

동아대 법대 야간성적이 되어 29살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입학한 것입니다. 신입생 O/T를 갔는데 저는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니까 다들 웃으며 황당해 했어요. 스물아홉에 무슨 대학을, 그것도 법대라니 현실에 맞는 걸 하라고 조언하면서 아무도 저를 지지해주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주님을 믿고 감사했답니다. 이 순간에도 저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한 번도 일하지 않고 놀면서 먹는 생활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어떻게 공부를 잘 하며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부유하게 되겠습니까?

공평하신 하나님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저는 매일 530분에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서 밤 12시까지 공부했었죠, 1학년 1학기 때 주야간 수석을 했습니다. 고시반 입실시험에 외국어가 있었어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죠. 시험 1주일을 앞두고 도서관에 가서 일본어 고시 기출문제를 다 공부했는데, 외국어 성적으로는 졸업생을 포함하여 제가 Top 이었어요. 과거에 1년 동안 미치게 공부했던 일본어 실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입니다. 동아대학교는 고시반 제도가 잘 되어있어 지독료라는 기숙사에 들어가니 밥도 주고 학비도 면제해 주고 저에게 딱 맞는 학교였어요.

날마다 감격하면서 공부를 했었어요.

저는 도서관에 가면 먼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오늘 주신 말씀을 메모해서 포스트잇에 붙여 놓은 후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에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세요. 제가 혹시 시험에 합격해서 저 잘 낫다고 설치게 되면 떨어지게 해 주세요. 온전히 하나님 은혜로 깨닫고 그렇게 살 수 있을 때 합격시켜 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정필도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겁니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을 하고 휴학 후 서울에서 공부하여 다음 해 2차에 합격을 했죠. 대학교 4학년 때 합격을 한 거죠. 제가 공황장애가 있어서 글을 쓸 때 누가 옆에 있으면 글을 못 썼어요. 너무 느려요. 2차 시험은 필기인데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기도를 했더니 주님께서 저를 안아 주시는 거예요. 그나마 평안한 마음으로 필기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흘 동안 시험을 치는데 쉬는 시간에는 잔디에 앉아 두 손을 들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떤 것도 제가 잘 나서 된 것은 없었습니다. 드디어 2002년에 사법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힘들 때 저에게 도움을 준 친구들, 가난하고 초라한 우리 집에 병든 엄마를 위해 심방 오셨던 고향 장길교회 권사님, 집사님, 장로님, 전도사님과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진정으로 그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를 안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반송큰시장서 1일 국수배달 봉사
▲반송큰시장서 1일 국수배달 봉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2003년 사법연수원에 다닐 때 지방신문에 제 기사가 조그맣게 났었는데, 그 기사를 본 서울에 있는 중앙지 기자로부터 연락이 와서 인터뷰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는데, 수시로 연락이 와서 제가 두 가지 조건(나를 있게 해준 은인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켜줄 것)을 제시했고, 그 기자가 승낙했습니다.

첫 번째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두 번째 내 꿈을 열어준 곳은 동아대학교 법대였다.”였지요.

그래서 그 즈음 신문 사회면에 실렸어요.

저는 지금껏 국선변호를 하더라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다 해서 해왔습니다. 열심히 변호사 업무를 하던 어느 날, 대전 소재 한 여중생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저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나와 우리 잘못입니다.” 일하다 말고 거제동사무소에 찾아가 사회복지 담당자를 만나 우리 동네 소년소녀가장을 2명 소개시켜 달라고 하여 매달 후원을 하다가, 이후 신문사와 변호사회와 결연을 맺을 때 중개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외롭고 무서웠던 순간을 기억하며 인권사각지대를 찾아가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명의 국내외 아이들을 돕고 있고, 소년원과 소년분류심사원의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기 위한 일들을 해왔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제 모교에 대한 고마움은 변호사를 시작한 해부터 형편 되는대로 저같은 형편에 처한 후배들에게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작년까지 1억원을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 같은 형부가 건설현장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변호사답게 냉정하게 사인을 밝힐 증거를 수집하지 못한 채 불쌍한 형부라는 생각에만 천착하여 너무나 감성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19개월 된 조카는 형부 영정사진을 보면서 아빠~”하고 웃고, 언니는 상실감과 우울증에 빠져있었지요. 그래서 그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 제가 많이 돌봤습니다. 그러면서 제 사랑을 받고 똑똑하고 밝게 잘 자라는 조카를 보며 저도 정말 기뻤고 제 삶도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이 키우는 보람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유별스럽게 아이를 좋아해서인지 싱글에서 엄마가 되었다.(입양)
▲유별스럽게 아이를 좋아해서인지 싱글에서 엄마가 되었다.(입양)

화려한 싱글에서 두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저는 오래 전부터 입양을 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커서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나이 40이 넘어가면서 아이나 나를 위해 더 이상 늦추면 안 되겠다 싶어 20117월에 입양기관에 가서 상담을 받고 입양신청을 하였고, 이후 절차에 따라 건강검진을 받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이미 19개월 조카를 돌보면서 예행연습을 한 것이죠. 입양기관에서 아이를 만나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이가 너무 작았어요. 2kg으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제 딸을 생후 50일 때 처음 만나 80일 무렵부터 키웠습니다. 아이가 약해서 잦은 병치레를 했고, 특히 열 경련을 할 때는 지옥이었어요.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간 것만도 10번은 족히 될 거예요. 응급실에서 밤을 샌 것은 부지기수이고, 입원병실에서 애 돌보면서 출근한 적이 허다합니다. 아이 도우미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애를 데리고 출근하여 법원 로비에서 기다리게 하고, 주말에 영장실질심사 때는 법원 복도에서 아이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20111월에 작은 언니가 백혈병에 걸렸어요. 그 해 여름에 제 조혈모세포를 증여하여 잘 이식됐지만 숙주반응을 일으켜 언니가 위독하던 11월에 초등학교 4학년 조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화려한 싱글로 살던 제가 201111월에 갑자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잠든 깊은 밤, 저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 이 아이들을 제 힘으로는 도저히 키울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이 아이들을 지켜주시고, 제게도 힘을 주시옵소서!”

당시 애들은 1, 5, 11살이었는데, 5살 조카는 동생을 예뻐하면서도 그 동안 이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밀려났다고 여긴 탓인지 심술을 부렸고, 11살 조카는 갑자기 잃은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컸습니다. 저는 기회 될 때마다 세 아이를 데리고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견문을 높이고 자존감 높은 아이들로 크길 바랐고, 저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이제 초등학교 2학년과 6학년, 3이 됐습니다.

애 셋은 김씨, 안씨, 위씨로 성이 모두 다릅니다.

이제는 어렸던 조카가 저를 위로하며 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를 먹여 살리는 믿음의 거장이 되게 해 주십사!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미애 변호사?

동아대학교 대학원(민사법학 석사)을 졸업했으며 제44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34기 수료, 해운대구청 고문변호사, 해운대구청 공직자윤리위원장, 부산여성문화회관 무료법률상담 상담위원, 부산광역시 지방세심의위원회 위원, 부산광역시 및 부산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 위원, 부산가정법원 소년위탁보호위원회 위원, 대한변호사협회 여성폭력방지 및 아동법률지원변호사단, 부산지체장애인협회 자문변호사, 부산가정법원 화해권고위원회 위원, 부산광역시 여성아동보호위원회 위원, 부산지방국세청 납세자권인보호위원회 위원, 부산국제영화제 후원회 운영위원, 부산변호사회 수석부회장 및 인권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자유한국당 부산광역시당 수석부위원장, 해운대구을(반송, 반여, 재송동) 당협위원장,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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