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구가 만난 사람
■김길구가 만난 사람
  • 한국기독타임즈/교회복음신문
  • 승인 2019.04.3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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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 농촌 활동가 이봉수 장로
이봉수 장로
이봉수 장로

마을 만들기, 농촌 활동가 이봉수 장로

김길구가 만난 사람

 

참여정부의 농정 3인방

외할머니 상동교회 세워

노무현 대통령의 곁에 있었던 농민출신 최측근의 한사람. 사람들은 박흥수, 김인식과 함께 이봉수를 참여정부 농정 3인방이라고 불렀다.

그의 부모님은 해방 전 일본 오사카에서 중매로 결혼하셨다. 부친은 택시기사셨는데 수입도 괜찮은 인기직업이었다. 당시 딸 셋을 두었는데 해방이 되어 귀국할 때는 큰 배를 살 정도로 돈도 모았다. “아버지는 그 배에 동포 300명을 싣고 귀국하다 영도 앞바다에서 우리 군함과 충돌하는 사고를 내 전 재산을 바다에 빠뜨린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서울 이태원에 정착 자그마한 가내공업을 하셨는데 사업이 잘돼서 일본의 적산가옥을 살 정도로 안정을 찾아가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지요. 그해 태어난 젖먹이 형을 구르마에 싣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는데, 청도에 이르러 홍역으로 어린 형은 죽고 말았어요.” 전염성이 강한 이 돌림병으로 다른 애들도 죽어나가자 더 있을 수 없어 자책하며 외할머니가 계신 지금의 김해에서도 오지인 상동대감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얼마 후 형과 그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고비 고비마다 던진

어머니의 말 한마디

그의 외할머니는 일본서 어머님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셨는데 귀국 후 상동에 정착하여 마을 한 가운데 초가를 구입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지금의 상동교회이다. 아버지는 휴전기간 중 전쟁의 재발을 우려하여 서울생활을 포기하시곤 김해읍에 나가 운수회사 소속으로 트럭과 버스기사로 일하셨는데, 일본 경험을 바탕으로 버스노선을 확정하는 등 김해버스업계서 대부(代父) 역할을 하셨다. 나중에는 부산의 제일 큰 천일여객으로 직장을 옮겨 일하다 큰 사고를 내자 그만 두고 천수답 논 1,500평으로 농사를 시작했으나 소농이라 좀처럼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더 큰 김해로 이사 가자고 했으나 어디 가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먹여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세운 교회를 떠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신앙적 결단이었다.

또 하나의 위기가 왔다.

나는 농어민 우수후계자로서 일본연수를 가서 도-농 협조체계를 배웠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일본의 기업들이 임가공 사업을 전개해 일거리를 제공하고 농민들은 이를 통해 지역소득을 올리며 주말에 농사를 짓는 제도였어요. 귀국해서 알아보니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농촌임가공사업이라는제도가 있었습니다. 군청과 농협의 협조를 얻어 축사 한 컨에 공장을 개조하여 신발의 밑창을 만들었는데 일본과 달리 일종의 하청기업이 되고 말았지요. 그때는 이미 신발업계가 사양산업으로 50여명을 거느린 이 공장은 12개월 만에 돼지 800마리를 날리고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돼지를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나니 9,000만원의 빚만 지게 되었지요.” 이때도 어머니는 일시적 시련이니 참고 견뎌라! 오르막이 높으면 올라가긴 힘들어도 내려가기는 쉬운 법이다.”고 위로해 주셨다.

누군가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시련은 계속되었다. 가뜩이나 형님의 사업실패로 그 가족들이 귀농하여 한 솥밥을 먹게 되었는데, 얘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자리를 잡아 가던 양돈축사에서 돈 콜레라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어머니 우린 이제 망했어요! 망했어!” 절규하듯 말했더니 어머니는 축사로 들어가 기도를 한 후 나와서는 나의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죽는 일은 없데이골짜기가 깊으면 물이 많이 나오는 법이야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200마리는 죽고 500마리는 다행히 예방백신 덕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800마리나 되는 큰 농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고비고비마다 들려주신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가족에게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좌)과 함께

이종찬 의원과의 조우

정치인의 영향력에 눈떠

그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민정당 원내총무시절이었다. 같은 경주 이씨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의 후손이 군부독재 전두환의 하수인이 된 것에 격분한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를 항의 차 간 것이다. 이 만남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비서관들과의 승강이 끝에 11시에 만날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경상도에서 온 농사꾼입니다. 의원님께 따지러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는 참 열린 사람이었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전두환 정권에 몸담은 처사가 옳은지를 따졌다. “그래요. 맞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생각이 있어 여기에 와사 이러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를 지켜봐 주시고 앞으로도 날 좀 도와주세요!” 그는 이 의원이 보여준 대인다운 면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농업현장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리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이 의원에게 서신을 써 보냈다. 그의 협조로 한농연의 법인등록이나 재정지원 등 굵직한 농민들의 현안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농민운동도 중요하지만 유력한 정치인 한 사람의 힘도 중요하고, 권력은 쓰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이때 갖게 되었다.

 

한국 하천살리기 운동의 시작

친환경운동의 출발점은 물이다

그가 김해시 농민후계자 이던 97<4대강 특별법>이란 것이 발의된다. 이 법은 하루 50만 톤 이상 취수하는 지역의 인근지역은 상수도 특별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 위한 법이었다. 법에 의하면 김해 역시 특별보호 구역으로 묶이게 된다. 그 법인 입법예고 되자 당시 경남지역 국회의원 이던 신한국당 의원 17명 전원이 찬성한 상태였다. “저도 처음에는 이 법의 의미를 잘 몰랐어요. 어느 날 상동면 부면장이 저를 찾아왔는데 이 법이 통과되면 우리 상동면은 모두 죽는다. 장화에 묻은 흙을 물에 씻기만 해도 위법이다. 농촌지역은 생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다김해시의 농민을 대표해서 회장인 자네가 나서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알고 보니 통과되면 부산시 취수장 인근 지역농민의 불편은 물론 땅값도 10분의 1로 폭락할 것이 분명했다. ‘4대강 특별법반대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대처한 끝에 새정치국민회의가 노동환경위원회의 이름으로 이법의 진행을 유보시키기로 선언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상수도 보호구역지정을 저지한다고 해서 수질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부산가면 물먹는다. 이렇게 반대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나는 ‘4대강 특별법반대대책위원회수질개선대책위로 이름을 바꾸고 환경운동에 매달렸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지역의 물을 맑게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우리 동네의 대포천 수질개선운동을 전개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1년 만에 5등급이던 대포천을 1급수로 바꾸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하천살리기 운동의 효시가 되어 이 캠페인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위원회는 물의 날 행사 때 대통령 표창을 받는 쾌거를 이룬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을 만나다

일련의 마을가꾸기 농민운동과 환경운동으로 그의 명성도 높아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 경남도지부장으로 임명받은 98년에 처음 인연을 맺었고, 그 후로 이봉수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다. 그 출발은 의외의 이종찬 의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DJ정권 출범과 함께 이종찬의원이 국정원장에 임명되고 5공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의원이 종로구 의원으로 당선되고, 지역타파를 위하여 노의원이 경남도위원장을 맡자 이원장이 김해에 가시면 이봉수를 꼭 만나보라고 추천하여 인연을 맺게 된다. 경남도위원회 사무차장을 거쳐 노무현의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하여 김해시 국회의원선거와 그의 퇴임을 준비하기 위하여 김해시장에 도전했으나 낙선하고 지금은 상동으로 내려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꿈꿨던 농민이 함께 잘사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 마을만들기운동에 여생을 쏟아가고 있다.

소년시절,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동생들을 위하여 학업을 포기했으나 나이 마흔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인제대학교를 졸업한 뚝심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고신 측의 장로로서 영원한 비주류에 속한다는 그는 예수는 혁명가라며 예수의 청년성을 잃은 요즘의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교계의 현실을 개탄한다.

마사회 부회장 재직시절에는 관례적으로 받아오던 수많은 봉투들 거절한 일화로 유명한 그는 현재 환경운동단체인 <맑은물사랑사람들>의 대표로 활동하며 고향인 김해에서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친환경산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 대통령의 투신 한 달 전에 만나 수확한 첫 딸기를 드리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는 그의 저서로서는 나는 한 마리 나비이고 싶었다밥 잘 먹어서 장가든 남자 이봉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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