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구가 만난 사람/ 이병수 교수(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장)
김길구가 만난 사람/ 이병수 교수(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장)
  • 교회복음신문
  • 승인 2018.07.1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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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으로 일구는 하나님 나라

다름으로 일구는 하나님 나라

김길구가 만난 사람/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장 이병수 교수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 소장 이병수 교수는 “사회의 발전 속도에 비추어 다문화 사역도 한계를 느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즈음인 2015년 5월 고신대 젊은 교수들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 동기는 이주민 문제가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고, 성경이 나그네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 기독교 대학인 고신대가 이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는데 저가 오랫동안 이 일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소장직을 수락했지요.”라며 설립 배경을 밝혔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 소장 이병수 교수는 “사회의 발전 속도에 비추어 다문화 사역도 한계를 느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즈음인 2015년 5월 고신대 젊은 교수들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 동기는 이주민 문제가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고, 성경이 나그네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 기독교 대학인 고신대가 이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는데 저가 오랫동안 이 일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소장직을 수락했지요.”라며 설립 배경을 밝혔다.

신명기 26장 5절에서 이스라엘은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사람’이라고 말한다. 선조들이 고대 근동지방의 떠돌이 집단이었다는 고백이다. 히브리인이란 말도 떠돌이를 뜻하는  하비루에서 유래되었다. 전쟁이나 영토분쟁, 홍수나 기근과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나 수탈과 억압 등의 사회적 격변으로 한 지역에 머물지 못하고 유랑하는 고달픈 조상의 삶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신앙의 골간을 이룬다.
우리나라도 국내체류 외국인 수가 2016년 7월말 현재 200만명을 넘어섰고, 이런 추세라면 2021년이면 300만명 시대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율로 인구절벽에 직면한 우리로서는 이민자가 줄지 않을 것으로 보여 그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구촌 다문화 시대에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를 만들어 다문화 품기뿐 아니라 지구촌시대 난민문제까지 제기하고 있는 화제의 인물 이병수 소장을 만나보자.
그의 이력을 보면 고신대 신학과 졸업하고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석,박사) 마치고 모교인 고신대에서 문화선교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함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함께

다문화 사역은 나의 운명,
국제결혼과 이주민체험이 동기

“제가 다문화 사역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저는 1982년 대만국적의 중국인 화교여성과 결혼했어요. 아내는 중국 산동출신의 비단장사 아버지와 전북출신 한국 어머니사이에 태어난 혼혈 여성입니다. 저의 아내는 태어나자 피부가 백인처럼 희고 머리카락이 노래 외국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뜻도 모른 체 ‘대놈’(그 당시 중국을 큰 나라 대大자의 의미로 ‘큰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데요. 저의 세 아이들도 피부가 너무 희고 머리카락이 노란색이라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 결혼하면 피부가 저렇게 되느냐? 며 의아해 합니다.”
그런 그에게 1988년에서 96년까지의 유학생활은 이주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유학 초기 함께 간 세 아들들이 영어가 서툴러 현지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데 사정을 안 초등학교 담임선생이 부산 초량 침례병원에서 30년 넘게 선교사역을 한 뒤 귀국한 은퇴 선교사를 물색해 영어교육을 맡긴 거예요. 그 선교사 부부는 우리 애들에게 영어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미국문화와 교회생활, 특히 주일예배를 섬기는 것과 교회 올 때의 옷차림은 물론이고 명절 때면 맛있는 과자와 선물로 가족 같이 저희 자녀들을 보살펴 줬지요. 그들은 저희 세 아들과 우리 가족들에게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감동의 환대, 자전거 선물…
진정한 사랑은 섬세함에서

“다른 하나는 미국교회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저가 있던 곳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남부 미시시피주 잭슨에 소재한 리폼드 신학대학원이었는데, 성탄절이 다가오자 외국인 유학생 가족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테니 자녀수대로 받고 싶은 선물을 신청서에 적어내라는 거예요. 이 행사는 제안한 곳은 인근에 있는 잭슨제일장로교회로 1인당 약 15달러상당의 선물을 주는 이벤트였어요. 저도 세 장을 받아서  애들에게 물어보니 장남은 야구 방망이, 둘째는 야구 글러브데, 막내는 저에게 자전거를 적어 보내래요. 자전거 가격이 100달러정도이니 난감했지요. 캠퍼스 기숙사는 미국학생자녀들과 한국 유학생 자녀들이 함께 살았는데 우리만 자전거가 없었어요. 주저하는 나에게 막내는 ‘아버지! 우리 집에는 남자가 셋인데 자전거가 없잖아요. 신청서에 적어주세요. 꼭이요.’라며 재촉하니 앞의 두 애 것은 취소하고 세 명 몫으로 자전거 한 대를 주면 어떠냐는 제안을 적어 보냈지요. 그리고 며칠 후 선물전달식이 있으니 교회로 오라고 해서 전 가족이 함께 갔어요. 그 행사는  교회의 큰 홀에서 열렸는데 홀에 들어서니 먼저 와있던 외국인 유학생과 그 자녀들, 교회 진행자들이 보이고 중앙에는 선물이 가득히 놓여있는데 정작 기대했던 자전거는 안보여요. 분명 우리가족에게 선물을 받으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 선물은 없으니 궁금했지요. 진행자는 유학생 자녀 이름을 한사람씩 부르며 선물을 나눠줬고 우리가족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진행자가 연세든 인자한 여성이었는데 저희 집 첫째 아들 이름 폴(Paul)을 부르자 홀 문이 열리면서 학생들이 자전거를 몰고 오는 거예요. 한 대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두 대, 세 대, 그것도 놀라운데, 네 대, 그리고 다섯 대! 오 마이 갓! 너무나 놀랍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예요. 저가 감격해 하고 있는데 진행자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가족은 한 대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섯 대를 준비하셨습니다’ 자전거도 자전거지만 자전거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마냥 크리스마스 선물로 비누며 향수, 그리고 예쁜 선물들이 주렁주렁 달아 놓은 거예요.” 그는 그때 그 감동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거기서 그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환대, 그리고 깊고 섬세한 사랑에 감탄하며 ‘진정한 사랑은 섬세함’으로 나타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자전거 다섯 대를 마련했는지 궁금해서 사회자에게 물어봤더니 이 행사를 제안한 교회는 초·중·고등학교와 매우 큰 수련회 시설, 그리고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낮선 동양의 이주민 가족을 위해서 자전가 다섯 대 기금을 마련키로 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캠페인 함께 한 6학년의 한 초등학교 여학생은 85달러를 기부하였는데 이 돈을 마련키 위하여 몇 주째 매주 금, 토요일을 애기 돌보는 알바를 감수해야 했다며 활짝 웃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그들의 섬김의 문화는 낯선 동양인의 눈에는 놀라움 자체였다. 자원봉사를 학점을 따기 위한 방편으로 마지못해 하는 우리의 문화와 확연히 달랐다.
“제가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한 가족 다섯 식구에게 자전거를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해 코끝이 찡했지요. 그리고 자전거를 사기 위해서 후원한 학생들 수십 명이 축하 및 격려 글자를 적은 큰 종이를 문고로 만들어서 우리 가족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문고에는 다양한 내용의 격려가 빼곡하게 차있었는데, 그 글들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미국 유학생활의 추억이 되었습니다.”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LA YMCA 정문 앞에 Welcome! Mr Kim!이라는 대형 펼침막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이렇듯 환대는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장학금을 하사하듯 전해주곤 감동 없이 홍보용 사진을 찍는 클라이언트를 배려치 않는 우리문화도 이젠 바꿔야 하지 않을까? 잠시 든 생각이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가족
터키 이스탄불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가족

귀국 후 중국근로자 사역시작
여전한 편견과 차별의 장벽

이러한 그의 경험은 자연스레 다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저는 1996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그 미국에서 겪었던 사랑의 보답으로 저희 아내와 함께 모 교회에 출석하는 중국인 근로자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내가 중국어 설교와 통역을 맡고 그 외 사역으로 김해 양산 창원 및 경남지역 여러 곳에서 일하는 중국인 근로자들의 애로점을 듣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돕기도 했지요.”
송월타월 공장 근처 중국근로자가 많이 출석하는 교회를 찾아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사모도 적극적이었는데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날에도 통역과 여러 사역으로 전국을 돌다보니 명절음식 준비는커녕 아이들이 라면을 끓여먹어야 했던 해도 있었다. 한번은 근로자 48명과 한국교인 6명 등 총 54명을 집으로 초청 예배한 후 그들이 손수 중국요리를 만들어 함께 식사하며 교제한 적이 있는데 고마워하며 고국에 돌아가서 가족들을 꼭 전도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민 중에 하나는 받은 임금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일이였는데 이일을 사모가 정직하게 도맡아 하자 신뢰가 생겨 다양한 사역으로 이어졌다. 배타적인 한국 땅에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도 적지 않았다. 보험도 없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산재를 당했지만 보상을 제대로 못 받고 심각한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았던 근로자들도 있었다. 두 부부는 병원이나 집을 방문하는 등 이방인들의 든실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임금체불, 산재로 손과 팔과 발이 절단된 이들을 위하여 고용노동청은 물론 적십자사와 인권시민단체 담당자등을 찾아다니며 문제 해결에 동분서주하였다. 불법체류자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딱한 이들을 위하여 기독병원과 의사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야 했다. 그 가운데 골수결핵 환자를 무료로 낫게 한 일과 오른쪽 손가락 5개가 완전히 절단된 근로자의 산재연금을 해결해 준일 등은 보람으로 남아 있다.

2번의 도전과 2번의 좌절
가정에 드리운 어둠의 터널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랄까?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했나. 매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화를 불렀다. 2007년과 2010년 6월의 하늘은  잔인했다. 부산광역시 교육감 선거 출마가 그것이다. 그간 부산교대 출신 교육감들의 독무대를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나선 2007년 선거결과 1위는 33.83%를 얻은 설동근 교육감에 이어 22.66%를 득해 2위로 폐했으나 차기를 위해 이병수라는 이름 석자를 확실히 알린 나름 의미 있는 선거였다. 2010년 임기제한으로 설동근 교육감이 출마치 않는 가운데 9명이 난립 출사표를 던져 맨 앞에 나온 임혜경후보가 당선돼 일명 로또선거로 불리며 선거 개선 요구가 빗발친 그해 선거의 패배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후보 단일화 실패가 페인이었지만 패배가 할퀴고 간 상흔은 생각 외로 깊고도 넓었다. 등록재산 1억 5천만 원의 이교수에겐 2번의 선거로 진 4억 5천만 원의 빚은 가정을 곤궁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여럽사리 이를 극복하여 가던 2013년 ‘마음의 상처는 몸에 흔적을 남긴다’고 했던가 큰 아들이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도 2번의 자해를 하는 등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그를 지켜준 것은 역시 신앙과 가정이었다. 이 깊고 긴 트라우마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7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다. 이때 그에게 힘이 된 말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이다’란 한마디였다.

김해에서 만난 모로코 청년인데 김해 모로코 식당에서 만난 청년들
김해에서 만난 모로코 청년인데 김해 모로코 식당에서 만난 청년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를 창립하다
난민문제도 다뤄

“사회의 발전 속도에 비추어 다문화 사역도 한계를 느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즈음인 2015년 5월 고신대 젊은 교수들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 동기는 이주민 문제가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고, 성경이 나그네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 기독교 대학인 고신대가 이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는데 저가 오랫동안 이 일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소장직을 수락했지요.”
2016년 2월 1일 창립총회를 가지고 부산지역의 대학 교수들, 변호사 및 의사와 대학생 및 일반인들을 포함하여 120명 정도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그해 3월 24일에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의 국내 첫 학술대회를 ‘건강한 다문화 도시 건설을 위한 발전방안’이라는 주제로 가졌고,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대포럼도 개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2월 8일에는 부산 경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난민 포럼을 개최하여 국내에 머물던 시각을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분쟁지역의 문제 등 시야를 지구촌으로 확대하자 언론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사업은 국내에 이주해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 가정 및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돕는 학술 중심의 국제 연구소입니다. 국내외 전국 100여 개 대학에 627명의 각 영역의 교수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을 돕기 위한 의사 변호사 실업인 및 대학생 동아리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는 당부의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교수요, 교육감 후보 등의 화려함 뒤에 짙게 드리운 이주민의 남편이요, 피부색 다른 이주민의 2세의 아빠로, 겪어야만 했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상처 입은 치료자’로 다시 선 이소장의 앞날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해 본다.

김길구 전 YMCA 사무총장
김길구 전 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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