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길구가 만난사람 / 김종윤 부산복지개발원 원장
■ 김길구가 만난사람 / 김종윤 부산복지개발원 원장
  • 교회복음신문
  • 승인 2018.03.0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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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복지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자

부산시 복지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자

김길구가 만난사람 / 김종윤 부산복지개발원 원장

김종윤 부산사회복지개발원 원장
김종윤 부산사회복지개발원 원장

 

전임 초이수 원장에 이어 김종윤 원장도 크리스천이라 찾아가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웠다. 우리나라 복지의 역사를 보아도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이 커서 그런지 복지기관이나 종사자들의 기독교 비율이 높은 편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복지란 단어가 눈에 띈다. 복지를 뜻하는 Welfare는 지내다, 살아가다 란 의미의 fare에 만족스러운 혹은 적절한 이란 의미의 well의 합성어로 만족스럽게 지내는 상태, 즉 안녕(well-being)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한국에서도 부산은 여러 지표상 안녕치 못한 도시 중의 하나다. 제레미의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예견한 완전고용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신화가 된지 오래라 쳐도 전국최고 수준의 노령화율도 그렇고 인구수만 보아도 2015년 기준 351만 명으로 전년도 대비 약 5,600명이 감소하여 이런 추세라면 오는 2035년에는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이 부산을 추월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산적한 문제를 고민하는 그가 재직 중인 부산복지개발원은 복지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부산시 출연기관으로 현재 직원 25명이 재직 중이다.

 

군작전중 사고로 팔을 잃어

제 고향은 경남 하동입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고향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는 난생 처음 진주라는 중소도시로 유학을 하였습니다. 또 대학은 중소도시에서 한 단계 넘어 큰 부산으로 오게 되었지요. 시골 촌놈이 진주, 부산대학교로 진출하는 영광을 얻게 되어 늘 부모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고향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던 시기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는 그는 은퇴 후면 고향으로 돌아가 연로하신 고향어르신들의 심부름꾼으로 농어촌 마을복지를 통해 자신을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완고하신 반대로 교회를 다니지 못했고, 할머니는 저와 저의 형님을 데리고 산길을 넘어 10리길 교회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신앙과 멀어져 있다가 대학을 다니면서 건성으로 교회를 다녔지요. 대학을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못했고, 국방의 의무를 완수하는 과정에 서해 5도 해상에서 야간 대간첩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팔을 잃고 낙향하여 실의에 빠져 있는 동안 글씨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성경을 필사하게 되었고 지금 아내의 전도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전역한 후 낙향하여 한우를 길렀으나 소 값 파동으로 무작정 부산으로 돌아와 경비원 생활을 잠시 하던 중 총무처 시행 7급 공채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했는데, 그 기쁨도 잠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인고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공무원 필기시험과 면접에 합격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저는 국가유공자라 믿고 범일동 신암 로터리 부근에 있는 보훈병원에 가서 신체검사 합격여부를 물었는데 의사선생님은 당신은 불합격, 사유는 팔이 없으니까였습니다. 너무도 낙담해 원무과장을 찾아 하소연을 하고는 연산동에 있는 시립의료원을 찾았습니다. 원장님은 마침 손님을 만난다고 1시간 후에나 볼 수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메모지에 주소와 이름을 쓰라고 해 적어 드렸더니 간호과장에게 전화를 하셔서 팔 문제는 시비 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신체검사를 마치고 단칸방으로 돌아오니 집주인이 전보가 왔는데 외출중이라 내일 다시 온다며 돌아갔다는 거예요. 궁금해서 전화국으로 찾아 갔더니 보훈병원 원무과장께서 전보를 보냈는데 합격 가능하니 빨리 병원에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울분만 토하고 주소와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그분께서는 보훈청을 통해 비슷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우리 집 주소를 찾아 전보를 쳤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화가 없었는데 참 훌륭한 공직자지요. 적극적으로 문제를 찾아 답을 구하고 애달파서 전보까지 쳐 주신 원무과장이 공무원으로서 저의 롤 모델이 되었죠.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차별과 편견, 인고의 세월 보내

공무원 시험 합격 후 오른팔이 없다는 이유로 당시 내무부를 거쳐 부산시로 그리고 동래구 장전1동으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 발령지에서도 장애인을 왜 보냈느냐고 상관이 인사부서에 항의하는 장면을 목격한 제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실력으로 이겨냈다.

당시에 상급부서로 가기 위한 소양고사를 치렀는데 그 시험에 운 좋게부산시 1등을 했지요. 그런데 인사부서에서는 주관식과 객관식 시험을 병행하여 치뤘음에도 글을 쓸 줄 아느냐’(그들 인식에서는 오른팔이 없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는 등 비아냥을 들어야했습니다. 시청 어느 부서에 배치해도 서로 저를 받지 않으려고 해 마음에 상처가 컸지요. 그때마다 앞으로 나는 어찌할꼬?’라는 자학과 자위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굴하지 않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공 살려 복지전문기로

그는 공직자로 근무하는 동안 지방재정분석 및 기획, 부산시를 상대로 하는 소송업무, 시정을 종합평가하는 평가팀장 등 기획업무와 노인, 장애인, 복지기획, 아동보호, 건강증진 등 복지업무를 총괄하는 팀장 또는 과장 등으로 폭넓은 경험을 했다. 서구 부구청장 재직 시에는 동료들을 독려하여 촘촘한 복지안전 시스템을 구축한 노력으로 서구청이 대한민국 복지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앉기도 했다. 전공을 찾은 것이다.

대학 때 전공이 사회복지였는데 당시는 사회복지분야가 워낙 생소했었고, 당시는 법정대학 소속이라 고시공부하는 분위기라 저 역시 그 분위기에 휩쓸려 고시준비로 대학 4년을 마쳤습니다. 공직을 맡은 후에도 사회복지업무는 관심 밖이었는데 주위의 권유로 복지과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장애인은 물론, 사회복지와 연관된 일을 많이하면서 사회복지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됐지요. 공직생활의 절반을 사회복지분야에서 일했습니다.”

복지논쟁과 관련 서구의 사회복지개념이 국민의 권리인 것에 달리 동양적(유교적) 복지는 시혜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냐는 일부 견해에 대해 “‘여민동락과 같은 철저한 민본사상에서 출발한다는 면에서 보면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했다.

 

에벤에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저는 공직생활 시작부터 장애인이라는 편견으로 많은 차별과 좌절을 맛봐야했습니다. 국가직 7급 공무원을 장전1동 사무소에 근무하게 했던 일, 팔이 없다고 서로 부하로 받지 않겠다는 일, 장애인이니 장애인복지팀장으로 장기간 근무하게 했던 일,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막막했고 늘 불만으로 가득했지요. 그러나 이 과정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연단하시고 또 다른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교인 부산대학교와 가까운 장전1동 사무소에 배치되다보니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순환보직이 일반화 되던 당시 복지정책분야에 근무하다보니 사회복지학 박사로서 학문적 틀을 튼튼히 할 수 있었으며, 기획부서 등 복지행정 분야의 다양한 역할과 경험이 장애인복지론’(양서원 간)을 낼 정도의 복지행정 전문가로서 폭넓은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 는 그는 네가 서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하나님의 손길을 절감하고 있다고

 

지역맞춤형 복지 필요

부산복지개발원은 부산의 사회복지정책을 개발하고 평가하는 기관입니다. 그동안 여러 원장님과 조직원이 합심하여 지역의 복지패널을 구축하고 부산의 복지정책을 선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복지정책을 개발하여도 재정이 확충되지 않으면 사장(死藏)되고 마는 경우가 많고, 평가에 있어서도 중앙정부가 전국적으로 통일된 평가 툴에 의해 평가를 함에 따라 지역의 실상에 맞는 복지정책을 펴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새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가 분권에 방점을 둠에 따라 지역단위의 복지정책을 기획하고 지역의 평가체계를 구축하는데 우리 복지개발원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과제로 그는 복지재정의 확충과 지방정부의 대응, 최근 대두되고 있는 ICT융합 복지시스템 구축, 빅데이터를 활용한 사회복지적 대응, 베이비 부머의 은퇴에 따른 사회참여 플랫폼 구축, 고령사회의 도래에 따른 노인복지시스템의 정비 등에 대한 연구와 지역단위의 대응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며, 이를 위한 과제로 연구원의 역량을 강화하고 현장과 정책부서인 부산시와의 다양한 소통과 교류의 기회도 늘여야 한다고 말한다.

 

 

섬김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지역의 많은 교회가 교회자원을 지역사회복지에 할당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여 경로대학과 무료급식, 그리고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로대학에는 30여명의 성도들이 교사로 섬기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저도 약 8년 동안 학감으로 함께 참여해 본적이 있지만 교사들의 헌신엔 늘 감사할 뿐입니다. 경로대학을 통하여 외롭고 소외된 어르신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웃과 교류하며 몰랐던 한글을 깨우치고 심지어는 마태복음 전체를 외워버리는 할머니, 실버댄스를 통하여 신바람 난 어르신, 난생처음 어르신들과 청와대, 청남대, 현대조선 등으로 소풍을 다녀왔던 일들은 참 소중하고 의미 있었다고 봅니다. 어떻든 많은 교회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만 교회가 이러한 사업을 수행할 때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신앙의 즐거움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오히려 해악이 되겠지요. 또한 어르신들은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생을 마감하는 어르신들처럼 죽음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죽음을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영생의 사상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 믿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성장은 신분을 초월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 협력하는 가운데서 출발하였다고 하지요. 다만, 조건 없이 섬기는 가운데 섬기는 이도 힐링이 되고 참여자도 서서히 동화되리라 믿습니다. 이슬비에 옷 젖듯이 말입니다.”

 

협치를 위한 네트워크 필요

저는 늘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구 3040만 명이 거주하는 1개 자치구에 1개의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이 과연 그 지역의 노인이나 장애인 복지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나마도 협소한 공간과 지리적 접근성 한계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아마 인근에 거주하는 일부 지역주민만 이용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지역의 복지자원을 활용 해야지요. 예를 들면 교인 중 혼자 거주하시는 어르신이 있다면 그 어르신의 안전은 교구나 셀 단위로 안부를 맡아주는 것이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 아니까요. 전문가 집단인 공공이나 복지기관이 지역단위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서로의 역할을 나누어 수행한다면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의 복지기관들은 필요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부족한 행정적 지원을 하게 된다면 바람직한 협치 모델이 되리라 믿습니다. 교회의 무한한 사랑의 자원을 활용하라고 말입니다.”

이를 위한 과제로 행정이 우선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보를 독점하고 개인정보보호란 명목 하에 섬기고 봉사하고 싶어도 다가서지 못한다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믿음은 외롭고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될 것임도 강조했다.

 

교회 통한 지역봉사 보람 느껴

교회활동과 관련된 부분을 굳이 말씀드리면, 새 가정부(새로 부부가 된 가정)의 부장으로 섬기면서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후배 부부들과 함께 성경공부며 다양한 서적을 읽고 토론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고, 목사님을 도와 동부경로대학이 지역 최고의 어르신의 안식처요 놀이터요 배움터로(저가 느끼기로) 자리매김하는 데 조그마한 디딤돌을 놓는 일에 동역하였던 일이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공무원으로 근무할 당시 노동조합이 선정한 존경하는 상사 베스트에 선발된 적이 있는 그는 잘 알려진 효자이다. 노인복지팀장으로 근무할 당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매주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다짐하고는 어머님이 여든 이후 여든 아홉 살 소천하시기 까지 그 약속을 지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부부가 같이 못갈 때에도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을 들고 부모님을 찾는 기쁨은 힘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실행이 자녀교육의 본이 된 것은 물론이다. 아들은 부산대학교 나노과학대학 박사과정 공부와 연구원으로 있으며, 피아노를 전공한 딸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중이다.

이웃 아저씨 같은 소탈한 미소, 그러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그의 열정은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때 체득된 독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그때마다 기도하라 하였지만 분이 치밀 땐 독서로 마음을 달래곤 합니다. 다양한 책속에서 공감을 얻고 그로 인해 옹졸했던 나 자신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또 고백합니다. ‘주님 옹졸한 이 못난이를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새벽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해준 아내(동부교회 권사)에게도 감사한다는 그가 애송하는 성구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대담 후...
대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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