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 최재영 목사의 방북 교회탐방기①
창간특집 / 최재영 목사의 방북 교회탐방기①
  • 김성원 선임기자
  • 승인 2017.12.2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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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후 북한 최초의 공식 예배당 ‘평양 봉수교회’를 가다
봉수교회당 십자가 탑 해체사건 통해 본 북한사회 이해

창간특집 최재영 목사의 방북 교회탐방기①
戰후 북한 최초의 공식 예배당 ‘평양 봉수교회’를 가다
봉수교회당 십자가 탑 해체사건 통해 본 북한사회 이해

최재영 목사
최재영 목사

 

최재영 목사는 미국에서 북한사역과 통일운동사역을 병행하는 Social Movement Group NK VISIO 2020을 설립하여 종교, 역사, 언론, 경제 등 4개 분야의 교류 사업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대북지원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특히 단절된 남북이 복음으로 소통하며 통합되도록 남북을 셔틀 왕래하며 오작교역할과 민족화해와 협력, 공조가 이뤄지는데 힘쓰고 있으며 최신 북한의 기독교 상황과 선교정보와 종합적인 북한 정세와 팩트 등을 실시간으로 입수, 분석하여 국내외 교회들과 학교, 단체, 연구기관 등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국내외에 선교전략과 통일방안을 제공해주고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 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박사
* 미주 장신대학교 대학원
* 미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한국기독타임즈 창간호에 북한의 기독교 교회를 탐방한 <북한교회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한국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교회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필자 주 -

재건축 후 완공된 봉수교회 외부 전경 모습
재건축 후 완공된 봉수교회 외부 전경 모습

 

봉수교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국내외 많은 이들이 방북할 때마다 궁금증과 기대감을 갖고 들르는 코스가 바로 평양 보통강변에 자리 잡은 봉수교회당이다. 나 역시 이곳에 갈 때는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나에겐 무엇보다 이곳에서 예배가 드려진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11시에 시작되는 남쪽교회와는 달리 주일예배가 언제나 오전 10시에 드려지는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에 완공된 이래 지금까지 남녘 동포를 비롯해 해외동포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 그뿐 아니라 언어소통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외국인 방문객들이나 평양주재 상사원, 주재원,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가진 신자들도 매주 예배를 참석해 기독교인의 도리를 다한다. 봉수교회 설립 이래 지금까지 27년 동안 이 교회당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예배를 드렸고 방문자들이 참관했다.
북측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방식대로, 외부 방문신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신앙방식대로 각각 예배를 드리는 이 곳, 그래서 인종과 국적, 사상과 이념은 달라도 모두 한데 어우러져 간절하게 예배를 드리는 국제적인 초교파, 범교단적 교회 기능도 지닌 곳이 바로 이곳 봉수교회이다. 따라서 봉수교회는 수식어도 다양하다. ‘전후 북한 최초의 공식교회’, ‘북한의 국가 브랜드 교회’, ‘현대 북한 기독교의 모교회’라는 호칭 등 다양하게 불려 졌고 반면에 부정적인 호칭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더 색다른 호칭을 붙이고 싶다. 그것은 바로 독일 통일의 상징적 역할을 했던 ‘성 니콜라이교회’처럼 이곳 봉수교회가 ‘북한판 성 니콜라이교회’가 아닌가 한다.

주일예배시 입구에서 강단방향을 바라본 예배당 모습(재건축 이전)
주일예배시 입구에서 강단방향을 바라본 예배당 모습(재건축 이전)

동독의 ‘성 니콜라이교회’ 같은 역할을 소망하며
봉수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난 언제나 25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이 됐던 ‘성 니콜라이교회’의 평화 촛불기도회를 떠올린다. 동서독의 직접적인 통일의 계기는 양측 교회간의 활발한 교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는 동서독과의 상황은 사뭇 다르지만 남북통일을 위한 역할을 상당수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이 주도할 수 있다고 본다. ‘성 니콜라이교회’를 독일 통일의 상징으로 꼽는 것처럼 이곳 봉수교회도 평화통일의 촛불기도회가 점화되어 통일의 메카로서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성 니콜라이교회’는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칼(무기)을 쳐서 보습(쟁기)으로’라는 슬로건하에 평화의 기도회를 열었다. 퓌러 목사와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가 주도한 기도회는 1989년 10월 9일 7만여 명, 11월 6일 5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평화시위로 연결됐으며 결국 평화의 기도회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마침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북측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소속 목회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동독은 내부의 모순이었으나 현재 우리 조선민족에게 있어서의 최대 모순과 최대의 적은 남조선을 정치, 군사적으로 식민지 삼고 있는 미국”이라고 강조한다. 북측 목회자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우리민족 당사자들끼리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는데 앞장서 평화통일의 촛불을 지펴야 하며 그 도화선이 이곳 봉수교회를 거쳐 삼천리 반도 전역에 퍼져나가야 한다.

최초의 봉수교회가 설립되기까지
현재 북한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다. 조그련은 김일성주석의 외종조부이며 창덕소학교 담임선생이었던 강양욱 목사의 주도로 설립된 북조선기독교련맹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해방직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존 교단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 결성된 북한의 공식 기독교 교단은 1946년 11월 28일에 설립됐으며 그 명칭은 ‘북조선기독교연맹’이었다. 그 후 1974년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조기련)’으로 개칭했고, 1999년 2월에는 또 다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으로 재개칭했다. 초대위원장에는 강양욱목사(1946. 11 - 1983. 1), 2대 위원장은 김성률목사(1986. 9.-1989. 2), 3대 위원장 강영섭목사(1989. 2.- 2012. 1. 21)가 역임했으며 그 후 1년 반의 공백을 깨고 현재의 강명철목사(2013. 7-현재)가 4대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해 봉수교회 설립을 최초에 추진한 장본인은 2대 위원장이었던 김성률 목사 시절이었으며 강영섭 목사는 최초로 건축된 봉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것이다. 평양 봉수교회가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드린 것은 1988년 11월 6일 주일이며, 장충성당의 설립을 공포한 것은 1988년 10월 2일이다. 봉수교회는 88년 봄에 착공해 11월 첫 주일에 헌당예배를 드렸는데 이로써 북한 최초의 공식교회는 내부의 판단에 의해 자력으로 건축한 것에 그 의미를 둔다. 그러다가 1989년에는 신축된 봉수교회 담임목사이자 조기련 평양시위원회에 소속해 있던 강영섭 목사가 조기련 3대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전국적으로 교회조직이 재정비되고 사역에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당시 김성률 위원장이 이끌던 조기련은 W.C.C(세계교회협의회) 회원으로 가입하기를 원했으며 회원가입 조건이 되려면 산하교회가 없는 연맹은 있을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원래 교회당을 세우려던 계획을 앞당겨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최초로 설립된 봉수교회를 가려면 평양역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만경대구역으로 가야한다. 거기서 대동강 서북지역 봉수산 기슭에 자리한 교회입구까지 가려면 모두 20분이 소요된다. 보통강 지류를 계속 따라 가다보면 교회당이 가까워진다. 현재의 봉수교회당 전망은 오히려 멀리 떨어진 보통강가에서 바라볼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현장에서 느끼지 못하는 전망이 오히려 먼 곳에서 바라볼 때 숲속과 조화를 이루는 풍광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회당이 멀리 보이는 주변 도로를 달리다 보면 흰 대리석재로 지은 교회당이 마치 유럽의 작은 궁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외관이 아름답게 보인다.
주택가 속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동산을 깎아 자리한 봉수교회당은 당시에도 주변에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담장 안에는 봉수교회당과 조선기독교련맹 본부, 목사사택 등 3개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에서 볼 때 정면에 봉수교회당이, 왼편엔 조기련 본부건물, 그 뒤로 목사사택이 자리하고 있다.
재건축하기 이전, 최초의 봉수교회 예배당은 1, 2층 합쳐 모두 450석 규모였다.  1988년 당시 건축비용은 북한 화폐단위로 약 50만원(미화 25만 달러)이 지출됐으며 국가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북한 교인들의 헌금을 비롯해 해외교회의 지원금 일부로 건축됐다. 첫 출발할 당시 교직자(목사, 전도사, 장로)는 30명 정도였으며 광복거리에 있던 가정교회, 처소교회 신자들을 규합해 300명 정도가 모여 봉수교회 공동체를 이뤘으며 당시 신자들의 평균 연령은 50대 이상이었다. 첫 출발치고는 매우 탄탄한 교세였다.
예배당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부는 벽면과 천장 등 전체가 온통 흰색으로 도색되어 매우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도록 했다. 순백의 우아한 분위기는 정결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한껏 더 자아냈다. 본당은 아주 길지 않은 5인용 나무 장의자를 네 분단으로 배치했으며 정면에는 작은 십자가와 설교 강대상이 놓여 있어 단조로움의 미학을 더해 주었다.

봉수교회의 재건축 과정과 시설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에 건축됐기 때문에 8년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점차 건물이 노후화됐다. 이 소식을 접한 남측의 예장통합 남선교회 전국연합회가 “백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교회를 세우자”는 결의를 모아 조그련에 전달하면서 재건축이 시작됐다. 기존 교회당을 철거한 뒤 2005년 11월 10일 기공식 예배를 마친 후 남북협력사업의 차원에서 신축공사에 들어간 것이며 이는 기존 봉수교회 건물을 완전히 헐고 그 자리에 연건평 6백 평 규모로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건축준비위원장을 맡은 남측의 김용덕 장로 재단에서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신축 교회당의 설계와 시설들은 당시로서는 초현대식이었다.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영국의 궁전이나 유럽의 고풍스런 예배당을 연상케 했으며 쌍기둥 모양의 석조 건물 지붕에는 화강암 십자가를 세웠고 내부의 벽면과 바닥은 대리석과 고급목재로 장식했다. 또한 스크린 장치와 조명, 음향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최첨단 시설을 구비했다.
건물은 지상 3층으로 설계됐으며 1층에는 사무실, 당회실, 접견실, 성가대실, 화장실을 갖췄고 2층에는 1,000여개 좌석을 갖춘 예배실, 3층은 2백석 규모 좌석을 갖췄다. 3층에는 방송실과 자모실도 갖췄으며 현재의 본당은 음향 및 영상, 동시통역, 냉난방, 보일러실,비상발전실,전압승압시설 등을 구비했다. 이로써 총공사비가 모두 33억 원이 소요된 것으로 보고됐다.
건축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2005년 5월 7일, 남측의 예장 통합측 남선교회 전국연합회와 북측의 조그련과 봉수교회측이 재건축에 대한 협의를 했고, 그해 8월 5일, 남측의 홍희천장로와 김용덕장로,북측의 강영섭목사, 오경우목사가 각각 합의서에 서명했다. 11월 9일은 신축감사예배를 드렸으며 2006년 2월 1일 철골공사,  5월 31일 콘크리트 공사, 11월 30일 상량감사예배를 드렸다. 당초 9월에 상량식을 갖고 성탄절에 입당식 예배를 드릴 계획이었으나 북 미사일 발사로 인한 장관급 회담 결렬,집중호우로 인한 대홍수,핵 실험 사태 등으로 건축 일정이 지연되어 오다 이날 상량식을 갖게 된 것이다.
상량식이후인 2007년 8월 30일에는 외부석 부착공사를 완공하고, 11월 3일 내부 인테리어공사와 냉난방 시공을 마무리했으며, 이어서 12월 8일 음향, 영상, 성구 설치공사를 완료했다. 마침내 12월 21일 입당식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이듬해인 2008년 4월 6일은 이곳에서 남북이 공동예배를 드렸다. 마침내 건축 최종단계인 ‘헌당식 감사예배’가 7월 16일에 봉수교회당에서 드려짐으로 모든 건축과정을 마쳤다. 이로써 신축 교회당은 내부에 승강기까지 갖췄으며 그랜드피아노는 물론 40석의 성가대석과 대형 스크린과 촬영시스템을 비롯해 현대식 설비들을 두루 갖추게 된 것이다.
봉수교회 300여 신자들은 언제나 아침 일찍 도착해 예배를 준비하며 준비찬송을 부르는데 그들의 웅장한 찬송과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조화를 이뤄 은혜가 넘친다. 또한 현대식 장의자 등 뒤에는 조그련에서 발간한 성경과 찬송가가 간격에 맞춰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강단정면에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고 강단에 꽃꽂이 장식은 전혀 없다. 신자들의 연령 분포를 보면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며 청년들은 거의 없고 여성이 70%를 차지했다.

재건축 이후 오늘날의 봉수교회2008년 7월 16일, 헌당식을 마친 이후 2015년까지 7년 동안 봉수교회는 양적부흥은 아니나 내실 면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의 개신교 교회는 자본주의나 서방세계의 교회와는 운영 면에서 그 방법이 다르다 보니 외형적인 괄목한 성장은 눈에 띄지 못하다.
2015년 현재 담임은 송철민목사(47세)이며 출석하는 신자 수는 변함없이 300명 정도 내외이며 예배시간은 여전히 매주일 10시에 드려진다. 봉수교회의 초대 담임이었던 강영섭 목사 이래 이성봉 목사 등 유력한 담임목사들이 봉수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했으며 재건축 당시부터 담임목사를 맡고 있던 손효순 목사는 투병 중 타계하고 현재의 송 목사가 뒤를 이었다.  교회당 좌측엔 조그련 사무실이, 그 뒤쪽에 있는 목사사택은 처음부터 그대로였다. 다만 마당 우측 담장 너머 작은 울타리 문을 통과하면 멋지게 펼쳐지는 일명 ‘에덴동산’이 나온다. 이곳에는 ‘제1온실’을 비롯해 ‘평양신학원’ 이라는 신학교 사옥이 들어서 있어 봉수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넓은 그림으로 볼 때 캠퍼스처럼 기독교 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봉수교회의 교세와 직제를 보면 송철민 목사를 비롯해 교역자, 장로 9명을 포함해 30여명이 섬기고 있으며 성가대원도 50여 명에 이른다. 송 목사는 전임 손 목사 밑에서 목회자 훈련을 착실히 받았으며 영어도 곧 잘하고 설교가 매끄럽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조부모가 기독교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생활한 것이 목회자가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송 목사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을 갖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회과학대학에서 조선역사를 전공하고 다시 평양신학원에서 통신과정에 입학해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지난 201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도 칠골교회에서 여러 번 설교한 것은 물론이고, 봉수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면서도 담임목사를 대신해 여러 차례 설교한 경력 등이 풍부했다. 특히 손효순 목사가 투병중인 기간에는 담임목사를 대신해 교회를 이끌어왔고 손목사가 타계하자 지난해 초 담임목사에 취임했다.
개신교회는 공식적으로 평양에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그련의 오경우 서기장의 증언에 의하면 508-515개의 가정교회, 처소교회 등이 운영되고 있어 이북의 공식적인 전체 기독교인 규모는 1만 5,000여명에 달한다고 했다.

 

현재 봉수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현재 봉수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봉수교회 가짜설’ 비판은 또 다른 형태의 종교테러
필자에게 있어서 봉수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벅찬 감격도 있지만 분단의 현실과 늘 착잡한 심정으로 예배에 임해서 그런지 때론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적 방황을 하곤 한다. 그 동안 봉수교회를 담임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노라면 참으로 구구절절 진정성 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언어의 옷을 입고 설교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는 것”인데 마치 나는 그 같은 감동을 매번 받았기 때문이다.
예배를 다 마치고 외부에서 방문한 우리 일행들이 모두 예배당을 빠져나갈 때까지 신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통로에 늘어서서 작별 찬송을 불러 줄 때면 눈물이 울컥 쏟아지며 가슴이 메어진다. 말을 안 해도 그들의 눈빛과 얼굴 표정을 다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몹시 아쉬운 건 외부 일행이 모두 나오면 잠시 후 교인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있다. 물론 점심식사나 친교의 시간, 각 기관별 모임도 없다.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의 교회가 그렇듯 교회는 있으나 구체적인 전도나 교회학교 조직이 없다.
북한에는 자국의 17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는 포교가 금지되어 있다. 어린나이의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분별력으로 종교를 선택하기 전까지는 전도를 할 수 없도록 국가에서 규정을 만든 것이다. 또한 정교분리 원칙이 아닌 사회이다 보니 조그련과 교회들은 아직도 당과 기관에 소속해 있다. 그러다보니 조그련이나 교회들은 활동과 사역 면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제한적인 건 사실이나 그 또한 북한식 기독교로 받아들여야 한다.
봉수교회가 재건축되고 입당을 마친 후 남측 기자들이 당시 조그련 위원장을 맡고 있던 강영섭 목사에게 “1200석이나 되는 교회당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도 만사운동(예장통합교단이 1만 교회 400만 신도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만사운동이라고 부른다)을 펼칠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녀본 노인들은 다 떠나가지(죽음) 젊은이들은 교회에 관심 없지 잘 안 된다”고 하소연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가짜일 수 없고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도 가짜일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예배시간에 찬송하고,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행위를 가짜라고 판단하는 행위는 무지의 소치이며 언어폭력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간절한 심령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이북의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왜 그렇게 모질게 칼질을 하는가? 왜 순수한 신앙의 양심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평소 자신들의 예배나 종교행위를 연기로 하는가 보다.
봉수교회와 북한의 다양한 교회형태들에 대해 가짜 운운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또 다른 이름의 종교테러를 저지르며 종교를 탄압하는 행위이다. 특히 남쪽의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이나 인사들 중에는 이런저런 신빙성 없는 근거와 이유들을 들이대며 북의 교회가 다 가짜이며 선전용, 외화벌이용 창구라느니 정치적인 쇼를 한다느니 주장한다. 북녘의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행위가 모두 다 가짜라면 오히려 오늘날 문제 있는 남한의 대형교회들이 더 가짜라는 건 왜 생각 안하는지 모를 일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찌들어 성공지상주의와 성장제일주의와 번영신학이 판을 치는 가운데 온갖 분쟁과 추문과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부 남한교회의 현실을 보면 그야말로 가짜교회로 단정 지을 수밖에 없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권력과 자본과 야합하여 권력 지향적으로 변한 채 상업적으로 전락한 모습들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결국 내가 볼 때 북한선교라는 명목으로 한국식 기독교를 북한에 전파하려는 행위는 오히려 종교청정지역인 북한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으로 비쳐진다.
  

지금은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가 정착하는 단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 혹은 ‘조선교회의 요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매우 부흥하고 흥왕했다. 남한의 기독교학계와 역사학계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비롯해 북한교회를 연구하는 유력한 기관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통계들을 종합해보면 해방 전 북한교회의 숫자가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일제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3년, 북한에 732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20년 후인 1942년에는 2,339개로 약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평생을 북한교회사 연구로 몸을 바친 이찬영 목사의 연구결과(해방전 북한교회 총람)에 의하면 해방전에는 이북에만 3,035개의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평안북도에 755개, 평안남도 724개, 황해도 870개, 함경도 492개, 강원도와 경기도에 194개의 교회가 있었다. 또한 정확하지는 않지만 북한 조그련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1950년 이전 북한 기독교는 교회수가 약 2,000개, 신자 20만 명, 목사 410명, 전도사 498명, 장로 2,142명이었다는 자료를 제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해방 전 그 많던 3천개의 교회당들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지고 전후 가정교회와 처소교회가 그루터기로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건축되면서 가정교회도 재정비되어 전국에 500개의 가정교회가 또 다른 형태의 북한식 기독교로 정착했다.
북한은 이미 1960년대 가정교회를 허락했다. 소위 ‘풀어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60대 이상 연령의 신자들에게 비공식적으로 기독교 종교행위를 무한정 인정했다. 평남 남포동에 거주하는 동산 안창호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여사, 만경대의 칠골 강선녀, 강원도 도당위원장 김원봉의 모친 김씨, 함남 영흥의 장관급 간부 문만옥 모친 황씨 등을 중심으로 200여개의 가정교회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형성됐으며 지금 현재는 515개 정도의 가정교회가 있다.
영국에는 영국식 기독교, 중국에는 중국식 기독교, 한국에는 한국식 기독교가 각국의 민족정서와 문화, 정치체제를 반영해 존재하듯 북한에는 토착화된 북한식 기독교가 있다.  이를 ‘북한식 사회주의교회’라고 호칭할 수 있으며, 교인들은 ‘사회주의적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북한교회들은 생존을 모색해가는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로서 당과 정부와 분리될 수 없이 일체가 되는 특별한 기독교 형태로 존속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봉수교회당 십자가 탑 해체사건을 통해 본 북한사회 이해
봉수교회 재건축을 위해 남측의 건축준비위원장으로 임명된 예장 통합측 교단의 김용덕 장로는 평양의 신축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건축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06년 11월 30일, 남북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공사현장에서 상량식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상량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평양에서 뜻하지 않은 큰 사건을 접하게 됐다. 자료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량식 당일에는 분명히 교회당 앞쪽 지붕 양쪽에 동판으로 제작된 높은 십자가 탑이 우뚝 올라가 있는데 헌당식을 마친 후 얼마 안 있어 두개의 십자가 탑이 사라져 버렸다. 현재의 봉수교회당 모습을 각 측면에서 다각도로 살펴봐도 두 십자가 탑은 온데간데없다. 다만 지붕 정면 한가운데 작은 크기의 화강석 십자가만 부착된 것이 확인될 뿐이다.
김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상량식을 마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조그련 위원장이던 강영섭 목사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자신을 찾아왔다고 한다. 사연인즉 북한 군부에서 봉수교회당에 십자가 탑을 높이 세우는 것을 알고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의 탑이 높이 서 있는 평양 하늘아래 감히 십자가 탑을 높이 세울 수 없다는 것이 군부의 항변이라는 것이다. 군부 측에서는 만일 십자가 탑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체적으로 직접 제거하겠다는 강경한 엄포를 놨다는 것이다. 결국 상량식 며칠 이후 높은 십자가 탑들은 다시 내려져야 했고 기독교의 브랜드 마크인 십자가 탑이 없는 교회당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북한의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조그련이라는 기구는 군부의 철저한 사상논리에 의해 그 활동이 제한된 것이다. 북한의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온다고 볼 때 조그련의 위상은 아직도 인민 다수의 지지와 관심이 미치지 못하여 그 역량이 크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원래 사회주의 북한은 기독교를 반동적 세계관으로 보며 ‘억압적 착취를 위한 사상적 도구’ 나 ‘제국주의 침략적 수구’등으로 규정하면서 인민들에게 막대한 해독을 끼치는 것으로 보고 끊임없이 제한의 대상이 되어 왔었다. 또한 정교분리 원칙이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군부 강경파가 종교정책에 제동을 걸거나 제한을 가해도 선군정치하에서의 종교정책은  어쩔 도리가 없으며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와 더불어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군사적 상황 하에서는 조그련 산하의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교회들도 종교 본연의 의미를 온전히 갖지 못하고 한정적, 상대적 가치만 인정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정서와 감정은 그뿐 아니었다. 어느 해외교포가 방북 일정 중에 대학원의 젊은이들과 대화하던 중에 지하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질문했더니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장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기들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며 불같이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에서는 음성적인 지하교회를 체제 전복세력이나 불순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북한 청년 학생들이 평소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 의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더구나 기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형성된 데다 북한 관리들이나 인민들, 청년세대들의 정서에는 아직도 미국인들이 믿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념이나 주체사상의 측면에서 볼 때 아직도 기독교에 대한 정서가 일반적으로 용인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대부분의 50-60대의 중장년 이상은 종교가 일종의 아편, 미신으로 간주되어 투쟁과 척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며 일반 인민들은 종교에 흥미나 관심이 없는 것을 필자는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사태이후 북한은 기독교를 제한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체 내에서 개선시키는 방향에서 외부 기독교와 협력관계도 유지하기 시작했다. 해외와 남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교회, 병원, 학교, 양로원 등 건축물이 들어서고 기독교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영생’과 ‘주체사상의 영생탑’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개선문 인근과 창전거리를 지날 때 우뚝 솟은 영생탑(永生塔)을 바라보니 평양의 야경과 어우러져 그 위용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높이 세워진 탑에는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이윽고 호텔숙소에 도착해 잠자리에 들기 전 무심코 창가를 통해 대동강 야경을 바라보니 그날따라 유난히 강 건너 주체탑의 불은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개혁주의 장로교단 소속의 목회자인 나는 어느 날부터 저 주체탑과 영생탑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기독교와 상반된 듯 보이는 주체사상과 주체철학의 원리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자세가 있었던가를 돌아보았다.
얼핏 보기엔 마치 기독교교리와 시스템을 복사한 듯한 저 영생탑의 문구를 일반 기독교인들이 읽는다면 대부분 경악할 일인지도 모른다. 마치 ‘기독교의 임마누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이는 이 탑들은 평양 중심지역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나 지역마다 높이 세워져 있다. 더구나 이를 바탕으로 유훈 통치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닌 몸이 어떻게 영생할 수 있고 어떻게 통치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단순한 시각에서 표피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영생’이라는 범주에서 학문적인 측면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주체사상은 인간을 육체적 생명 그 이상의 의미로 본다. 무엇보다 인간을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도 보는 것이다. 육체를 지닌 개인의 한 생애는 죽음으로서 끝이 있지만 그 사회와 집단은 영원히 존재하고 발전한다. 즉 이웃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며 자기 목숨까지도 민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때 그 사람은 영원한 사회적 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민중과 혁명의 이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헌신과 투쟁에 자기 목숨을 바칠 때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도 그가 지닌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정치적 집단과 더불어 영생’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영생탑’의 문구를 그런 의미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지 종교적 관점에서 이단적 교리로 보듯 해석하거나 판단하면 안 된다.
또한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영생이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살아생전에도 성령에 충만하면 영생을 맛보는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예수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안고 죽은 이후에는 천국에서 영생하는 삶을 살수 있다는 교리가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영생과 주체사상에서의 영생은 상호 보완하고 있다고도 본다.                     글⦁사진/ 최재영 목사

대동강 가에 세워진 주체탑을 중심으로 보이는 평양시 야경
대동강 가에 세워진 주체탑을 중심으로 보이는 평양시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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